[찰리 멍거 특집 1] 오판의 심리학
사회자 우리 대학원생은 경제 여러 분야에서 지극히 비합리적인 현상을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원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이런 패턴을 전혀 설명할 수가 없어서 다소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이런 패턴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30년 후배가 모여 있으며 일부는 질문을 원하고 있습니다. 찰리 멍거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은 후배를 아끼는 마음으로 시간을 충분히 할애해주기를 기대합니다.
멍거 부회장은 ‘오판의 심리학(Psychology of Human Misjudgment)’ 전문가를 자처하는 분입니다. 물론 오판 중 일부는 이코노미스트 헨리 카우프만(Henry Kaufman)의 말대로 유행과 사회적 압력에서 유래하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버크셔 해서웨이 본사가 뉴욕도 아니고 심지어 L. A.나 샌프란시스코도 아닌 네브래스카 소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것도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멍거 부회장은 이런 오판에 대해 논의하면서 특히 중요한 문제 두 가지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첫째 “나는 오판의 문제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오판에 의지한 탓에 그동안 많은 대가를 치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오판의 대가가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둘째 “오판의 문제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에 그동안 내가 좋아하던 일을 더 잘 수행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멍거 부회장의 강연이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멍거 오판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매우 많은 나도 사실은 많은 오판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남만큼 많이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하버드대 법학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이 끔찍한 무지에 대처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판이 특정 패턴을 갖춘, 지극히 심각한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판을 다루는 이론이나 수단이 없어서 내가 직접 심리 시스템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도 했지만 주로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시스템을 개발해 오판에 대처하면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우연히 《설득의 심리학》을 발견했는데, 저자인 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는 매우 젊은 나이에 종신 교수가 되어 수강생을 2,000명이나 거느린 거물이었습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3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입니다. 이 대중적인 학술 서적은 조잡한 내 시스템의 빈틈을 많이 메워주었습니다. 덕분에 내 시스템이 잘 작동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시스템을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나는 여기서 행동경제학을 논하려고 합니다. 경제학이 과연 사람의 행동과 무관할 수 있을까요? 경제학이 행동과 관계없다면 도대체 무엇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나는 어떤 실체든 다른 모든 실체를 반드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심리학에 일부 타당한 해법이 있다면 경제학은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반대로 경제학에 일부 타당한 해법이 있다면 심리학도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경제학과 심리학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연구가 절대적으로 옳으며, 이를 무시한 사람이 지금까지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이런 문제들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오판의 주요 원인 24가지
인센티브 위력 과소평가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연령대에서 인센티브의 위력을 잘 이해하는 상위 5%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도 평생 그 위력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게다가 해마다 인센티브의 위력을 더 과소평가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 놀라게 됩니다.
인센티브의 위력을 설명할 때 내가 즐겨 인용하는 사례가 페덱스 이야기입니다. 페덱스 시스템의 핵심은 매일 밤 물류 중심지에서 모든 소포를 신속하게 환적하는 작업입니다. 만일 신속하게 환적하지 못한다면 이 시스템은 온전히 유지될 수 없습니다. 페덱스는 한때 이 작업에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양심에 호소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묘안을 찾아냈습니다. 그동안 야간 환적 작업에 대해 시간급을 지급했는데 이것을 환적 단위 급여 지급으로 바꾸자 시스템이 원활하게 굴러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인센티브가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제록스를 설립한 조 윌슨은 회사 설립 초기에는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직에서 물러나 제록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수한 제록스 신형 장비가 부실한 구형 장비만큼도 팔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장을 방문해서 조사해보니 부실한 구형 장비를 팔 때 판매원이 받는 수수료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이곳 하버드에는 지금도 스키너의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강화(reinforcement)의 위력에 매우 관심이 많았던 그는 명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버드 실험 과학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그는 여전히 정상급 학자입니다. 그의 실험은 매우 독창적이었고 결과는 반직관적이면서도 중요했습니다. 단순히 실험을 위한 실험이 아니었습니다. 스키너의 명성에 오점을 남긴 것은 이른바 ‘망치 든 사람 증후군’이었습니다. 이는 망치 든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이는 현상입니다. 스키너는 학계에서 극단적인 사례에 속하지만, 똑똑한 사람이 이런 증후군에 빠지는 사례는 드물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른 오판의 주요 원인을 다룰 때 사람들이 왜 스키너처럼 망치 든 사람 증후군에 빠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하버드대 법학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하버드 사람이 한 예일대 교수를 두고 “블랜차드는 선언적 판결(宣言的 判決, 판사가 민사 소송에서 당사자의 권리, 의무, 책임 등을 선언하는 것)이 암까지 치유해줄 것으로 생각하는 딱한 늙은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스키너도 그런 식이었지요. 그는 박식한 인물이었지만 사고방식이 다르면 누구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이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옳다고 밝혀지는 순간 명성을 잃게 됩니다.
현실 부정
내가 처음으로 깜짝 놀랐던 사건이 있습니다.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던 친구가 타고 가던 항공기가 북대서양에서 사라졌고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제정신이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TV를 보면, 자식이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한 범죄자인 경우에도 어머니는 자식이 결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실 부정입니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견딜 만한 수준까지 왜곡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현실을 어느 정도는 왜곡합니다. 이것도 끔찍한 문제를 빚어내는 오판의 주요 원인입니다.
대리인 비용은 인센티브가 빚어내는 편향
내가 초창기에 경험한 일입니다. 한 의사가 멀쩡한 담낭(쓸개)이 가득 담긴 부셸(약 36리터) 크기의 바구니를 네브래스카주 링컨시에 있는 진단 검사실로 보냈습니다. 이 병원은 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했는데도 5년이 지나서야 이 의사를 해고했습니다. 나는 그 해고 과정에 참여한 늙은 의사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의사는 단지 돈벌이를 위해서 멀쩡한 담낭을 절제하면서 해마다 여러 환자를 불구로 만들거나 살해했던 건가?” 그는 대답했습니다. “절대 아닐세, 찰리. 그는 담낭이 만병의 근원이라고 믿었다네. 환자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담낭을 최대한 빨리 절제해야 한다고 믿었던 거야.”
이는 물론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나 정도는 덜하겠지만 이런 대리인 비용은 모든 분야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대리인 비용 탓에 정말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상업용 부동산 판매나 기업 매각을 주선하는 중개업자가 그 예입니다. 나는 70 평생 살아오면서 객관적 진실을 말하기는커녕 이와 비슷하게 말하는 사람조차 본 적이 없습니다.
인센티브의 위력 탓에 그럴듯하게 포장된 끔찍한 행태가 나타나는 사례가 또 있습니다. 원가 가산(cost-plus) 방식으로 계약을 체결해온 국방부에서 많은 폐단이 드러나자 미국은 이후 연방 정부가 원가 가산 방식 계약을 체결하면 단순한 범죄 정도가 아니라 중죄로 다루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법률회사 대부분을 포함해서 수많은 기업이 여전히 원가 가산 방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인센티브가 빚어내는 편향 탓에 이런 끔찍한 행태가 만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행태를 주도하는 젊은이를 기꺼이 사위로 삼고 싶어 합니다.
이런 인간 심리는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래서 금전 등록기가 개발되었습니다. 금전 등록기는 부정행위를 저지해 우리 문명을 지켜준 일종의 수호성인입니다. NCR 설립자 존 패터슨은 이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한 인물입니다. 자그마한 매장을 경영하던 그는 현금 도난이 빈발한 탓에 돈을 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금전 등록기 두 대를 들여놓은 이후 이익이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매장을 폐업하고 금전 등록기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이 또 있습니다. 1,000페이지에 이르는 심리학 교과서에서도 인센티브가 빚어내는 편향을 다루는 내용은 달랑 한 문장뿐입니다. 심리학 개론 강좌에서 누락되었다는 말이지요.
일관성·몰입 편향(인지 부조화를 벗어나려는 경향)
인간의 심리에는 난자와 비슷한 속성이 있습니다. 난자는 정자 하나가 들어온 뒤에 다른 정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아버립니다. 인간의 심리에도 이런 성향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이는 보통 사람은 물론 학계 대가에게도 나타나는 성향입니다. 저명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에 의하면 나이 많은 기득권층 물리학자는 혁신적인 물리학 신개념을 한 번도 수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입견이 없어서 사고가 유연한 젊은 물리학자는 이런 신개념을 수용합니다. 저명한 물리학자조차 명백한 증거까지 무시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려고 하는데 우리 같은 대중이야 오죽할까요?
남이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견해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견해를 공표하면 그 견해는 우리 뇌리에 새겨집니다. 만일 교육 기관에서 학생이 자신의 견해를 강하게 주장하면서 고수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이는 본질적으로 무책임한 행태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학생이 자신이 펼친 주장에 속박되는 일은 절대 피해야 합니다. 견해 공표는 고통스러운 입회 의식처럼 우리의 뇌리에 새겨져 유연한 사고를 가로막습니다. 중국이 전쟁 포로에게 사용하던 세뇌 시스템은 효과가 단연 탁월했습니다. 중국은 포로에게 세세한 사항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을 공표하게 했는데 이후 포로는 서서히 그 서약에 속박되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고문보다 효과가 훨씬 좋았습니다.
조건 반사 편향
나는 심리학이나 경제학을 수강한 적이 없지만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조건 반사에 대해서는 배웠습니다. 아시다시피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을 치면 그 개는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립니다. 세상 사람을 대상으로 이런 조건 반사를 시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조건 반사는 우리 모두의 일상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요소입니다. 우리는 돈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이른바 이차적 강화(secondary reinforcement)라는 일종의 조건 반사를 하게 됩니다. 실제로 전체 광고의 4분의 3은 순전히 조건 반사 원리를 이용합니다. 예를 들어 버크셔가 최대 주주인 코카콜라를 생각해봅시다. 코카콜라는 올림픽 영웅이나 신나는 음악처럼 온갖 훌륭한 이미지와 연상되기를 바랍니다. 대통령의 장례식 등 침울한 이미지는 연상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코카콜라 광고에서 느껴지듯이 이런 연상은 실제로 효과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심리 작용은 모두 잠재의식 상태에서 진행되므로 매우 교활합니다. 이제 ‘페르시아 전령 증후군’을 살펴봅시다. 페르시아 황제는 나쁜 소식을 가져오는 전령을 죽였습니다.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고요? CBS 설립자 빌 페일리가 20년 동안 보여준 행태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입맛에 맞지 않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대 기업의 지도자였는데도 비현실적인 세계에 자신을 가둔 채 20년 동안 어리석은 결정을 남발했습니다.
페르시아 전령 증후군은 지금도 건재합니다. 몇 년 전 아르코(Arco)와 엑손(Exxon)은 텍사스 상급 법원에서 변호사와 전문가를 대거 동원해 노스 슬로프 유전 지역 관련 수억 달러짜리 소송을 벌였습니다. 이 소송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미친 모자 장수의 다과회처럼 아직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두 석유회사는 소송에 수천만 달러를 퍼부었지만 여전히 미궁을 헤매고 있습니다. 짐작건대 아무도 경영진에 나쁜 소식을 전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양사 경영진은 수억 달러를 받아낼 수 있다고 여전히 믿고 있을 것입니다. 직원 처지에서는 페르시아 전령처럼 패전 소식을 전하고 목숨을 잃는 것보다 달아나 숨어 지내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요.
경제학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나는데, 나는 이런 현상이 수없이 반복되는 모습을 평생 보았습니다. 복잡한 기술 제품 A와 B가 대체재라고 가정합시다. A의 가격이 X일 경우, 경제학의 법칙에 의하면 B는 가격이 X보다 낮을 때 더 많이 팔려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격이 X보다 높을 때 더 많이 팔리는 사례가 많습니다. 이는 정보 비효율성에 의한 조건 반사 때문입니다. 즉 가격이 높으면 품질도 높다고 생각하는 ‘가격-품질 연상 심리’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격을 더 올릴 때 매출이 더 증가합니다. 이는 수없이 반복되는 순수 조건 반사 현상입니다.
‘경제학자는 정보 비효율성을 논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런 현상을 파악하고 있었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경제학에서 이런 명백한 현상을 발견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게다가 경제학자 대부분은 정보 비효율성의 원인이 무엇인지조차 파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파블로프가 발견한 조건 반사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스키너는 조작적 조건화라는 개념을 도입해, 개가 기대했던 반응을 보이면 벨을 울리고 나서 보상해주었습니다. 스키너는 무작위로 보상을 제공해 비둘기가 미신에 빠지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도 비둘기처럼 미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강력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조작적 조건화는 정말로 효과가 있습니다. 다만 스키너는 그 효과를 다소 과장했을 뿐입니다.
기업에서 빚어내는 이 끔찍한 편향의 원천은 바로 회계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300억 달러를 날려버린 웨스팅하우스입니다. 절대로 자금을 빌려주면 안 되는 사업자가 건설 업체와 호텔이라는 것은 천치도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웨스팅하우스는 호텔을 건립하는 건설 업체에 소요 자금 100%를 빌려주었습니다. 십중팔구 엔지니어 출신이었을 웨스팅하우스 경영자는 심리학 과목을 배우지 않았을 것이며, 두둑한 인센티브를 받는 건설 업체 세일즈맨에게 농락당했을 것입니다. 이 거래 덕분에 초기에는 재무제표에 훌륭한 실적이 기록되었습니다. 회계 시스템이 이렇게 부실하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실한 회계 기준이 사람의 끔찍한 행동을 불러온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범죄 정도가 아니라 중죄입니다. 현금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빈민가를 거닌다면 이는 많은 범죄를 유발하는 행위이므로 커다란 죄악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실한 회계 시스템도 범죄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죄악입니다. 웨스팅하우스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희한하게도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 중에는 조지프 제트(Joseph Jett)가 키더 피보디(Kidder Peabody)에서 벌인 짓을 설명해준 사람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 회사는 회계 시스템이 매우 부실했고, 조지프 제트는 간단히 숫자를 조작해 이익을 만들어냈으며, 그 결과 막대한 보상과 명성을 얻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항상 조지프 제트 같은 사람이 있는데 나는 모든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더 큰 잘못은 그렇게 부실한 회계 시스템을 만들어낸 놈에게 있는데, 내가 알기로 그놈은 아직도 응당한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상호성 편향(남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이론 포함)
치알디니는 상호성 편향도 기막히게 분석했습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치알디니의 책을 한 권씩 드리겠습니다. 센스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여러분은 자녀와 친구에게 즉시 이 책을 사줄 것입니다. 이 책보다 더 좋은 투자는 절대 없을 테니까요.
상호성 편향은 매우 강력한 현상입니다. 치알디니는 캠퍼스를 돌아다니면서 ‘비행 청소년 동물원 데려가기’ 봉사자를 모집했습니다. 캠퍼스에서 요청받은 사람 6명 중 1명이 봉사 활동에 참여하겠다고 수락했습니다. 통계 자료를 축적하고 난 그는 다시 같은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했습니다. “매우 수고스럽겠지만 매주 이틀씩 오후에 비행 청소년을 동물원에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이 요청에는 수락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면 매주 하루만이라도 동물원에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응답자의 3분의 1에서 2분의 1이 수락했습니다. 처음에 더 부담스럽게 요청하고 나서 부담을 덜어주는 식으로 부탁하자 수락 비율이 3배나 높아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심리가 잠재의식 차원에서 자신도 모르게 조작될 수 있다면 우리는 ‘엉덩이 걷어차기 시합에 출전한 외다리 선수’와 같은 처지입니다. 우리 형편도 매우 어려운데 남에게 과도하게 베푼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남의 기대에 부응한다는 이른바 역할 이론(role theory)이 적용되는데, 이것도 일종의 상호성 편향입니다.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는 학생을 죄수와 교도관 두 집단으로 구분해 역할 연기를 맡기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14일로 예정되었던 이 실험은 6일 만에 갑자기 중단되었습니다. 심각한 고통, 신경쇠약, 병적인 행태 등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무시무시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실험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문제의 원인에는 상호성 편향과 역할 이론뿐 아니라 일관성·몰입 편향도 있었습니다. 학생은 죄수와 교도관 역할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자기 생각까지 지배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관성·몰입 편향은 어디에서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각이 행동을 바꿀 수 있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행동이 생각을 바꾼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뒤늦게야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달았답니다.
롤라팔루자 효과(헨리 카우프만은 사회적 증거가 빚어내는 편향이라고 설명, 특히 불확실성과 압박 속에서는 남이 내린 판단이 과도한 영향을 미침)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 사건이 있습니다. 한 여성이 서서히 살해당하는 장면을 약 40명이 수수방관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모두가 수수방관하니까 그 수수방관이 올바른 행동으로 인식되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미시경제적 사고와 손익 비율 등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실제로는 심리 개념과 경제 개념이 거듭 상호 작용합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독한 바보입니다.
거물 사업가도 사회적 증거에 휘둘립니다. 몇 년 전 한 석유회사가 비료회사를 인수하자 다른 석유회사도 다투어 비료회사를 인수했습니다. 이들 석유회사는 비료회사를 인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한 석유회사에 유리한 일은 다른 석유회사에도 유리하리라 추측했을 뿐입니다. 이들의 비료회사 인수는 모두 참담하게 실패했습니다.
효율적 시장 이론은 버크셔 해서웨이가 보여준 실적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유행한 놀라운 학설입니다. 버크셔 해서웨이가 해를 거듭하며 우수한 실적을 유지하자 사람들이 시장 효율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노벨상을 받은 한 경제학자는 “2시그마(22분의 1 확률) 사건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후에도 버크셔가 계속 탁월한 실적을 기록하자 그는 3시그마(370분의 1 확률) 사건이라고 말했고, 그다음에는 4시그마(1만 6,000분의 1 확률)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이후에도 이론을 수정하기 싫었던 그는 마침내 6시그마(5억분의 1 확률)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경제학자는 자산 운용 업계에 진출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강화’ 개념을 생각해봅시다. 예컨대 우리가 주가 상승을 예상하고 지수 상품을 매수했는데 실제로 주가가 상승하면 우리는 보상과 칭찬을 받습니다. 즉 강화가 이루어집니다. 게다가 주가지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반영하므로 사회적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사회적 증거까지 결합하면 강화 효과가 매우 강력해집니다. 그런데 주가지수는 항상 완벽하게 효율적일까요? 예를 들어 1973~1974년 주가 폭락이나 이른바 ‘멋진 50종목(Nifty Fifty)’의 전성기에도 시장 지수가 효율적이었나요? 이런 심리 개념이 옳다면 주가지수는 불합리성에 휘둘린다고 보아야 합니다.
수식이 우아해서 채택된 효율적 시장 이론
경제학자는 수식의 달인입니다. 망치 든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이들은 수식이 우아한 효율적 시장 이론에 매료되어 다소 지저분한 대안을 외면했습니다. 위대한 경제학자 케인스가 “정확히 틀리는 것보다 대충 맞는 편이 낫다”라고 말한 것을 잊었습니다.
대조 편향(대조 현상이 인식을 왜곡하는 현상)
치알디니는 수업 시간에 양동이 세 개로 멋진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양동이 세 개에 각각 뜨거운 물, 차가운 물, 미지근한 물을 담고 나서 학생에게 왼손은 뜨거운 물에 담그고 오른손은 차가운 물에 담그게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학생에게 양손 모두 미지근한 물에 담그게 했습니다. 학생의 양손 감각 기관은 대조적인 상황에 큰 영향을 받은 터이므로, 똑같이 미지근한 물에 대해서도 한 손은 뜨겁다고 느끼고 한 손은 차갑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감각 기관은 절대 온도가 아니라 상대 온도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 인식에는 비약 효과도 있어서 온도가 일정 수준 이상 변해야 비로소 인식하게 됩니다.
나는 마술사가 내 시계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마술사가 대조 상황을 만들어 우리 감각 기관을 혼란에 빠뜨린 것이지요. 마술사는 우리 인식을 조작해서 시계가 사라지는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 사람도 늘 대조 상황을 만들어 우리 인식을 조작하려고 합니다. 치알디니는 그 예로 부동산 중개인을 제시합니다. 시골뜨기가 도시로 전근해 오면 부동산 중개인은 터무니없이 비싸면서 형편없는 집을 두 군데 보여줍니다. 그러고서 가격이 약간 비싼 집을 보여주면 시골뜨기는 이 집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수법은 효과가 매우 좋아서 부동산 중개인이 애용하고 있습니다. 항상 먹히니까요.
우리 삶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서 인생이 망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한 훌륭한 여성이 끔찍한 부모 밑에서 자란 탓에 정말이지 끔찍한 남자와 결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초혼이 매우 끔찍했던 탓에 그보다 조금 낫다는 이유로 형편없는 재혼에 만족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웃고 있지만 장담컨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즐겨 인용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부모 유산으로 놀고먹는 멍청한 친구가 해준 말입니다. “찰리,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집어넣으면 곧바로 튀어나오지만 미지근한 물에 넣고 천천히 온도를 높이면 그 물에서 죽는다네.” 실제로 개구리가 그렇게 죽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사업가는 장담컨대 확실히 그렇게 죽을 것입니다. 유력한 거물급 사업가인데도 말이지요. 이들이 바보라서가 아닙니다. 대조 상황이 사소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놓치기 쉬워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판단력을 높이고 싶다면 대조 상황이 빚어내는 편향에 대비해야 합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 편향
이른바 밀그램 실험이 있습니다. 이 실험에 관한 심리학 논문이 1,600편이나 나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밀그램은 권위자를 내세워서 평범한 사람이 무고한 시민에게 심각한 전기 고문을 가하도록 유도해냈습니다. 이 실험은 히틀러가 집권에 성공한 원인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으며 당시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권위자의 막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진보적 관점의 실험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례가 또 있는데, 조종사와 부조종사에 대한 실험입니다. 여기서는 조종사가 권위자입니다. 이 실험은 실제 항공기가 아니라 시뮬레이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조종사는 노련한 부조종사를 옆에 두고 항공기를 추락시킬 무모한 행위를 합니다. 부조종사의 25%는 항공기가 추락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천치라도 알 만한 조종사(권위자)의 무모한 추락 행위를 방조했습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은 매우 강력한 심리 편향입니다. 이 편향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 이에 관해선 나중에 다시 논의하겠습니다.
과민 반응 증후군(소유물 박탈 위험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현상)
지극히 온순하고 귀여운 개도 물고 있는 먹이를 빼앗으려 하면 사람을 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노사 협상 과정에서 회사가 노조의 기득권을 빼앗으려 하면 노조 역시 회사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이웃이 근처의 자그마한 섬에 약 1미터짜리 소나무를 심은 탓에 옆집 사람이 즐기던 항구 조망 각도가 180도에서 179.75도로 축소되었습니다. 이후 두 이웃 사이의 처절한 싸움은 〈해트필드 앤 맥코이(Hatfields and McCoys, 미국 남북전쟁 직후 해트필드 가문과 맥코이 가문의 분쟁을 담은 영화)〉처럼 끝없이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