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피티즘’의 세례를 받은 여성 CEO들
워런 버핏은 여러 여성 경영자들을 가르치고 지원했다. 그는 ‘경영학 강의’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비유나 일화를 들려주곤 했다. 그런 교수법은 ‘버피티즘(Buffettism)’이라고 불렸다. 버피티즘의 세례를 받은 여성 CEO들 가운데에는 캐서린 그레이엄이 가장 주목을 받았다.
워런 버핏은 시대에 앞서 양성평등을 지지했고, 오랫동안 여성 친화적인 행보를 이어왔다. 버핏은 여성들을 교육하고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를 후원해왔다. 그 결과 남성으로는 유일하게 미국 매거진 〈포춘〉의 연례행사인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회의’에 초대받기도 했다.
버핏의 이런 성향을 고려할 때, 그가 여러 여성 CEO들이 역량을 갖추고 발휘하도록 가르치고 지원한 활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지도한 여성 CEO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 〈워싱턴 포스트〉 발행인이었던 캐서린 그레이엄(1917~2001)이다.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의 자회사인 보샤임 보석회사의 CEO로 수전 자크를 발탁했고, 다른 자회사의 여성 CEO인 도리스 크리스토퍼와 캐시 배런 탐라즈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20년 주부였다가 미국 9위 경영자로
캐서린은 1963년 〈워싱턴 포스트〉의 경영을 넘겨받아 1991년까지 경영했다. 언론사는 그의 집안의 가업이었지만, 20여 년 동안 가정주부로 지내온 46세의 캐서린은 경영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캐서린은 우울증을 앓던 남편 필립 그레이엄이 자살한 뒤 이 회사의 경영을 맡게 됐다. 더욱이 당시 미국 사회는 여성의 사회활동에 제도적·관습적인 장벽이 높고 두터웠다.
그러나 캐서린은 워싱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 작은 매체를 유력한 전국지로 키웠고, 회사를 내실 있고 빠르게 성장하는 주식회사로 변신시켰다. 발행인으로서 펜타곤 문서 및 워터게이트 보도를 뒷받침했다. 경영자로서는 가족기업이던 회사를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주주 이익에 부합하게 이끌었다.
캐서린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500대 기업 CEO에 이름을 올렸다. 〈포춘〉이 선정한 ‘위대한 CEO들’ 리스트에서 9위에 올랐고, 1993년에 이 매체가 선정한 전미경영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교수 앞의 여학생처럼 멍거에게 배워
버핏의 지도가 없었다면 캐서린은 손꼽히는 경영자로 변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캐서린은 처음엔 멍거에게서 경영을 배웠고, 이후 버핏의 가르침을 받았다. 캐서린은 회고록에서 “나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자녀와 손자손녀 신탁재산까지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렇다 할 경험이 없었다”면서 “워런에게 먼저 상의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버핏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러면 어떨까요? 제 파트너 찰리를 만나보세요. 찰리와 저는 대부분 의견을 같이합니다.” 캐서린은 그래서 버핏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멍거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멍거는 재미있고 총명했다. 캐서린은 노란색 노트를 꺼내 멍거의 말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캐서린은 위대한 교수 앞에 서 있는 여학생처럼 그렇게 했고 그래서 멍거에게 좋은 인상을 줬다. 그 광경을 본 버핏이 웃었다. 버핏은 그 모습을 화제 삼아 두고두고 캐서린을 놀렸다.
멍거와 캐서린은 오랫동안 활발하게 서신을 나눴다. 캐서린은 “정말로 묘한 경험이었다”고 술회했다. 경영에 미숙하고 내성적이었던 캐서린은 자신이 충분할 정도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늘 속을 태웠다. 하지만 멍거의 편지를 보면서 자신이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됐다. 멍거는 캐서린이 생각보다 더 잘하고 있다고 계속 확인해줬다.
버핏은 캐서린의 피그말리온
버핏은 1974년 〈워싱턴 포스트〉의 이사가 되었다. 버핏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캐서린에게 경영을 가르쳤다. 버핏이 캐서린을 경영학교에 등록시킨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캐서린은 “버핏에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버핏은 캐서린에게 다른 사업에 대해 설명했고, 세계 기업들의 주요 사례를 들었고, 경영을 잘하고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지적했다. 아울러 자신의 경영 철학을 전해주면서 구체적인 사항을 가르쳤다.
캐서린은 개발되지 않았던 자신의 자질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버핏을 피그말리온 같은 존재로 여겼다. 피그말리온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조각가로, 그가 조각한 아름다운 여성은 실제 여인이 된다.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에서는 한 음성학자가 거친 말투에 예의 없는 여성을 완벽한 억양을 가진 세련된 여인으로 변모시킨다.
버핏은 자신이 알고 있는 비유나 일화를 들려주는 교수법을 활용했다. 이 방식은 캐서린을 편하게 해줬다. 캐서린은 그런 비유나 일화, 교수법을 ‘버피티즘’이라고 불렀다. 캐서린은 버피티즘의 사례로 다음 몇 가지를 들었다.
“나는 당신의 오랑우탄입니다”
버핏은 “우리의 역할은 당신에게 무릎을 떨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떨면서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캐서린에게 “당신은 모습을 비뚤어지게 비춰주는 거울 앞에 선 것 같다”면서, “당신의 모습을 제대로 비춰주는 거울을 마련해주는 것이 내 책무”라고 말했다.
버핏은 멍거의 ‘오랑우탄 이론’에 동의했다. 이 이론의 요지는 “똑똑한 사람이 오랑우탄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면 오랑우탄은 그냥 앉아 바나나만 먹는데, 이야기를 끝내면 그 사람은 더 똑똑해진다”는 것이다. 버핏은 자신이 캐서린의 오랑우탄이라고 주장했다. 캐서린은 “그런 면도 없지 않았다”며 “그와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말하는 것에 대해 항상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들려줬다.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멍거의 지론이다. 멍거의 오랑우탄 이론은 이 지론을 극적인 비유로 바꾼 것이다.
“투자자 버핏의 인상은 예상 밖이었다”
버핏과 캐서린의 만남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버핏은 멍거와 함께 캐서린을 찾아가서 〈뉴요커〉 매거진을 인수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는 실행되지 않았고 캐서린은 버핏을 잊고 지냈다.
2년 뒤인 1973년, 버핏이 운영하는 버크셔 해서웨이는 〈워싱턴 포스트〉 B주식의 10%를 매입했다. 그는 캐서린에게 편지를 보내, 주식을 사들인 이유를 설명했다. 버핏은 과거 월트디즈니 주식처럼 〈워싱턴 포스트〉 주식도 내재가치에 비해 저평가된 상태라고 보았다. 또 “흔해빠진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포스트에 투자함으로써 여러 해에 걸쳐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훨씬 더 보람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당시만 해도 버핏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캐서린은 버핏이 어떤 사람인지 두루 평판을 들어보았는데 한결같이 좋은 얘기만 돌아왔다. 매사에 분명하고 똑똑하며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 캐서린은 캘리포니아에 간 김에 버핏을 만났다. 그는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마음에 들었다”며 이렇게 들려줬다.
“그의 인상은 예상 밖이었다. 그는 그동안 내가 만난 금융계 인사나 경제계 거물들과 전혀 닮지 않았다. 건장해 보이는 중서부 출신같이 보였다. 나는 평생을 두고 두뇌와 유머의 조화를 중시했는데, 그는 그 조화를 절묘하게 이루고 있었다.”
이후 둘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버핏은 캐서린을 만나 얘기를 나눔으로써 〈워싱턴 포스트〉가 괜찮은 투자 대상이라는 생각을 굳혔다고 밝혔다. 실제로 버핏은 이후 〈워싱턴 포스트〉 주식을 더 사들였다.
캐서린, 버핏에게 바닷가재 먹는 법 알려줘
버핏은 캐서린에게 충고의 말을 담은 짤막한 편지를 계속 보내줬다. 캐서린은 하루에 두세 번씩 버핏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버핏은 늘 친절하게 대답하며 도움을 줬다. 사소한 개인 문제부터 회사와 관련한 중대한 문제까지 상의했다.
캐서린도 버핏을 가르쳤다. 그 교육은 주로 생활 습관에 국한됐지만 말이다. 이에 대해 버핏은 캐서린에게 “내가 회계장부를 가르치면서 대한 방식대로 당신은 저녁 식탁에서 나를 대했다”고 말했다. 어느날 저녁 식사 때 버핏은 난생처음 보는 바닷가재에 용감하게 달려들어 먹으려고 했다. 캐서린은 바닷가재를 뒤집어 오른쪽부터 먹으라고 설명했다. 버핏은 나중에 “당신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몇 주 후에 다시 그 자리에 앉아 뚫기 힘든 껍데기 쪽부터 먹으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버핏은 지나칠 정도로 돈을 아꼈다. 한번은 둘이 공항에 함께 있다가 캐서린이 버핏에게 전화를 걸 10센트짜리 동전이 있느냐고 물었다. 버핏은 지니고 있던 25센트짜리 동전을 바꾸러 가려 했다. 캐서린은 “25센트짜리도 괜찮다”고 말했다. 버핏은 겸연쩍어하면서 25센트짜리 동전을 건네줬다.
버핏, 〈워싱턴 포스트〉의 자사주 매입 조언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자사 주식을 되사는 기업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캐서린은 그때 회사가 보유한 돈을 자사 주식을 사들이는 데 썼다가는 회사가 성장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버핏은 〈워싱턴 포스트〉 주식을 사들이는 것이 이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의 주가가 실제 가치보다 매우 낮은 수준이라며, 당시 캐서린이 고려 중이던 다른 어떤 사업보다도 자사주 매입이 투자 가치가 높다고 강조했다. 캐서린은 경영진에게 설명하고 이사회에 자사주 매입 안건을 올렸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후 20년 동안 자사주의 45%를 되사들였다.
버핏은 1973년부터 〈워싱턴 포스트〉 주식을 사들였다. 전체 매수 금액은 1,100만 달러로 알려졌고, 2013년까지 40년 동안 주식가액은 10억 1,000만 달러로 약 92배로 불어났다. 연평균 수익률이 12%에 이른다. 〈워싱턴 포스트〉도 자사주 매입을 통해 이 정도 수익률을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버핏에게서 인생의 가르침도 받았다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의 자회사인 보샤임 보석회사의 CEO로 수전 자크 상무를 발탁한 결정에 대해 사내 발표에서 “그녀만의 특별한 고객 우선주의와 유능한 사업 기술”을 꼽았다. 버핏이 CEO 자리에 선임한 1993년, 수전의 나이는 불과 34세였다.
버핏이 나중에 이와 관련해 2008년에 보낸 주주서한에서 “전문 경영인들에게 반드시 화려한 이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수전의 능력은 어떤 MBA 학위보다 빛난다”면서 “수전은 시급 4달러의 점원으로 보샤임과 인연을 맺은 후 특유의 명민함과 사교성, 사업에 대한 열정으로 CEO 자리에 올랐다”고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
수전은 버핏에 의해 경영자의 길을 걸었을뿐더러, 개인적·업무적으로도 큰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다음 날 신문 기사로 보고 싶지 않은 언행을 삼간다는 것이었다. 이 가르침을 생각하다 보면 직업윤리에 걸맞은 행동을 하게 되고 높은 기대치에 맞춰 살게 된다고 말했다. 수전은 20년간 보샤임을 경영한 뒤 2013년에 은퇴했다.
주방용품 판매회사인 팸퍼드 셰프를 창업한 여성 경영인 도리스 크리스토퍼는 2002년에 회사를 버크셔 해서웨이에 넘겼다. 매각 대금은 9억 달러였다. 도리스는 버핏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매우 똑똑하고 친절했으며 인간적인 면모가 빛을 발했다”고 들려줬다. 이어 버핏의 진실함, 정직함, 상도덕을 존경하고 존중하게 됐다고 말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2006년 기업 뉴스 통신사 〈비즈니스 와이어〉를 인수했다. 이 인수는 〈비즈니스 와이어〉의 여성 경영자 캐시 배런 탐라즈가 버핏에게 먼저 제안해 성사됐다. 캐시는 “버핏과 나는 처음부터 마음이 통했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 회사에는 외부 고문이 없다”면서 “오로지 버핏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 달에도 몇 번씩 버핏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설명했다.
여성 경영자를 키워낸 버핏에 대해 버핏의 외동딸 수지는 자신이 청소년기였던 1960년대 이미 버핏은 여성 이슈에서 진보적이었다고 회고했다. 1953년생인 수지는 “나는 직업 선택에 대해 내 세대가 많이 들었던 간호사나 선생님, 주부와 같은, 주로 여성에 특화된 일을 하도록 강요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점에서 내 부모님이 성평등 지지자였음이 매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버핏과 함께 일하게 된 여성 CEO들도 그와의 인연을 특별한 행운이라고 여겼음에 틀림없다.
참고문헌
- 캐서린 그레이엄 자서전, 캐서린 그레이엄 지음, 중앙일보, 1997
- 버핏의 프로포즈를 받은 여인, 카렌 린더 지음, 김세진 옮김, 갈라북스, 2013
- 〈버핏클럽 1호〉(2018년 6월 발행)에 실린 백우진(〈버핏클럽〉 편집장) 님의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