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투자는 운명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관점에서 19세기 말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은 여성의 일생과 자산 관리에 대한 소설로 재해석할 수 있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부담을 지지만 남성에 비해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 여성이 경제와 노후에 더 신경 쓰고 더 대비해야 할 이유다. 정승혜 모닝스타코리아 이사는 여성성에 가격에 대한 직관력(가치 평가), 조심스러움(리스크 통제) 등 성공적인 투자자가 될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농담 같은 말이지만 수긍되는 지점이 있다. 아울러 글로벌 자산운용업계에서 일하는 여성 매니저가 소수이지만, 여성 매니저와 남성 매니저의 운용 성과에 차이가 없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정 이사는 여성들에게 “그러므로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투자라는 낯선 세상으로 발을 내디뎌보라”며 용기를 북돋는다.
1883년, 프랑스 작가 모파상은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을 발표한다. 그의 장편 중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책은 노르망디 귀족의 딸 잔느의 고된 일생을 담았다. 잔느의 바람둥이 남편 줄리앙은 외도를 일삼다가 부적절한 관계이던 이웃집 백작부인에게 살해당한다. 잔느의 아들 폴도 아버지 줄리앙과 다를 바 없고, 설상가상으로 폴이 진 빚으로 저택마저 남의 손에 넘어간다. 재산 한 푼 없는 잔느에게 남은 것은 폴이 데려온, 엄마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린 손녀 하나다.
1929년,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발표한다. 이 책에서 메리라는 여성에게 자신을 투영해,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자기만의 돈과 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의 여성 교육 기관인 거턴대학과 뉴넘대학에서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로 강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강연의 원고를 수정, 보완해 에세이로 펴낸 것이 바로 《자기만의 방》이다. 당시 영국에서 여성은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고, 여성이 소유한 재산에 대한 권리도 남편이 행사했다. 2016년 개봉한 영화 〈서프러제트〉는 여성의 참정권 쟁취 투쟁을 잘 그렸다.
2017년 3월, 글로벌 운용사 SSGA(State Street Global Advisors)는 도발적인 마케팅을 벌였다. SSGA 젠더다양성지수 ETF SE 출시 1주년을 맞아 미국 맨해튼 월가의 상징인 황소 동상 맞은편에 두려움 없는 소녀(Fearless Girl) 동상을 세운 것이다. 달려들 것 같은 황소 앞에 작은 소녀는 ‘덤빌 테면 덤벼봐!’ 하는 모습으로 두려움 없이 서 있다. 이 소녀상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독려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한국 여성의 경제적 참여와 기회는 153개국 중 127위
세계경제포럼은 지난 2006년부터 〈글로벌 젠더 갭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를 통해 글로벌 젠더 갭 지수(Global Gender Gap Index)를 발표해왔다. 이 지수는 경제적 참여와 기회, 교육 성취도, 건강과 생존, 정치 권력 강화라는 4가지 하위 부문으로 구성되며, 2020년에는 153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2020년 ‘글로벌 젠더 종합지수’는 69%로 나타났다. 4가지 측면에서 여성의 삶의 수준이 남성의 69% 정도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1위인 아이슬란드는 88%다. 우리나라는 67%로 153개국 중 108위다. 미국은 72%(53위), 중국 68%(106위), 일본 65%(121위)다. 153개국 전체에서 여성의 건강과 생존, 교육 성취도 수준은 각각 남성의 97%와 96%로 차이가 크지 않지만, 정치 권력 강화는 25%, 경제적 참여와 기회는 58%에 불과하다.
이 보고서는 ‘경제적 참여와 기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여성이 리더십 위상 측면에서 느리지만 긍정적인 진전을 이룬 것과 대조적으로, 노동시장 참여율은 정체되고 재정 불균형은(평균적으로) 약간 더 커져서 올해 경제적 참여와 기회 부문은 후퇴한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적으로 성인 여성의 55%만이 노동시장에 참여해서 남성 참여율 78%와 비교된다. 회사에서 비슷한 지위에 있더라도 여성이 받는 임금은 남성과 40% 이상 차이가 난다. 또한 많은 국가에서 여성은 신용, 토지 또는 금융 상품에 접근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여성은 사업을 시작하거나 자산 관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경로가 제한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상황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건강과 생존 부문 중 세부 항목인 기대수명은 106%로 남성보다 더 오래 산다.(〈글로벌 젠더 갭 보고서〉를 보면 대체로 여자의 기대수명이 남자보다 길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도 있다.) 경제적 참여와 기회 부문에서는 56%로 127위인데, 이 부문의 세부 항목인 ‘남성과 비슷한 일을 할 때 받는 임금’은 55%에 불과하다. 남성보다 더 오래 사니까 돈이 더 필요한데도 임금은 낮은 것이다.
모닝스타의 크리스틴 벤즈는 〈여성과 투자〉라는 스페셜 리포트에서 미국 여성에 대한 흥미로운 통계를 보여준다. 그는 ‘여성의 은퇴에 대해 꼭 알아야 하는 75가지 통계’를 통해, 미국 여성의 평생 소득이 남성보다 낮으면서 기대수명이 길어 은퇴 준비가 골치 아픈 상태라고 했다. 핵심만 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2. 65세 여성의 평균 연간 사회보장 혜택은 65세 남성의 혜택보다 20% 적다.
3. 여성의 평균수명은 남성보다 약 5년 길다.
4. 성인 딸은 성인 아들보다 부모의 비공식적인 장기 간병인이 될 가능성이 2배에 이른다.
3번과 4번 통계는 모파상 소설 《여자의 일생》에 나오는 잔느의 삶을 연상케 한다. 가족들의 뒷바라지는 ‘그녀의 몫’이 될 확률이 높다.
우리나라의 현실도 만만치 않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많고, 결혼하더라도 남편의 정년이 보장되지 않고, 이혼율도 높다. 출산율도 낮아서 사회보장제도인 국민연금을 지탱해줄 젊은이가 줄어든다. 국민연금연구원 조사에 의하면 50대 이상 중·고령자가 노후에 필요한 월 평균 최소 생활비는 부부 기준 176만 원, 개인 기준 108만 원가량이다. 하지만 2019년 기준 국민연금의 월 평균 수급액은 52만 원에 불과하다.(100세시대연구소, 《대한민국 직장인 은퇴백서》) 평균수명은 남녀 모두 꾸준히 증가해서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평균수명은 여성 88세, 남성 83세다. 그래서 여성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자산 관리와 투자 공부가 더 필요한 것이다.
아마존에서 여성 + 투자 + 부(Women, Investing, Wealth)로 검색하면 어마어마한 책이 쏟아져 나온다. 여성들의 먹고사는 걱정은 서구 사회에서는 이미 오래된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것은 여성들만의 담론이 아니다. 딸이 어떻게 먹고살까 하는 걱정은 엄마보다 아빠가 더 많이 한다. 가부장적이고 남성 위주의 사고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딸의 경제력을 엄청 걱정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샤이 아빠’라고 부른다. 1968년생 나의 남편은 툭하면 밀레니얼 2008년생 딸에게 “너 커서 뭐 하고 살 거야? 엄마 아빠는 너 대학까지만 지원할 거야”라고 진심 어린 협박을 한다. 선거 때마다 후보 번호까지 점지해주시던 1942년생 나의 아빠도,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결혼하지 않는 1972년생 딸에게 “실버타운이 2억 원 정도 든다고 하더라”라고 귀띔해주셨다. 지금은 2억 원으로는 갈 수 있는 실버타운이 없을 거다. 아빠들은 현실적이어서 딸의 민주적 참정권보다는 경제력 걱정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법정 정년은 60세지만 직장인은 평균 49세(2018년 경제활동인구조사)에 주된 직장에서 퇴직한다. 정년보다 11년 일찍 퇴직하는 것이다.(같은 책) 옛날 아빠들은 딸이 결혼을 안 할까 봐 걱정했지만, 지금 아빠들은 딸이 결혼해도 사위의 정년이 보장되지 않으니, 결혼하라는 말 대신 먹고살 계획(!)을 세우라고 닦달한다. 영화 속의 송강호 아빠는 아들의 계획에 감탄하지만, 현실 속의 아빠는 딸이 계획이 없을까 봐 노심초사한다.
그러므로 여성의 투자 본능을 깨워라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기 위해 투쟁해왔고 상당한 성공을 이뤘다. 교육받을 권리, 정치에 참여할 권리, 사회적 권리, 임금 평등은 투쟁의 대상이다. 그러나 경제적 기회를 찾고 부를 이루는 것은 투쟁으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것은 성별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젠더 갭 보고서〉에서 지적했듯이, 세계적으로 여성의 경제 참여율은 남성의 절반밖에 안 된다. 같은 수준이라고 해도 더 오래 사니 문제가 될 판인데, 절반 수준이니 더 큰일이 난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가락만 빨고 있을 것인가?
신은 감당할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했다. 여성은 부를 더 쌓아야만 하는 운명이지만 좋은 투자자가 될 수 있는 특성을 여성성 안에 부여받았다. 매사 조심스럽고(리스크 통제), 항상 가격을 따지며(가격과 가치의 차이를 구분), 같은 재화라면 어디가 더 싼지 찾아다니고(차익 거래), 언제 세일을 하는지(좋은 마켓 타이밍)를 꼼꼼하게 비교하고 토론도 한다(리서치 능력).
중요한 것은 좋은 마켓 타이밍에서 과감한 액션으로 연결한다는 점이다. 평소 리서치를 잘 해두면 예상치 못한 가격 변동(깜짝 세일, 익스클루시브 세일) 상황에서 직관력이 작동해 매력적인 가격임을 바로 알아차리고 행동에 옮긴다. 더 내려가지 않을까 머뭇거리다가 매수 타이밍(세일 기간)을 놓치지 않는다. 적기 매수는 평소 리서치로 직관을 다지고 현금을 준비한 자만이 할 수 있다.
어떤 맥락에서는 궁상맞아 보일 수 있는 이 특성이 투자에는 필수 요소다. 특히 철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하는 가치투자에 더 유리한 자질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성 펀드매니저가 절대적으로 적음에도 불구하고, 가치투자 하우스인 신영자산운용에 여성 매니저가 많은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여성 매니저는 절대적으로 소수다. 2020년, 모닝스타는 〈여성과 투자〉 스페셜 보고서에서 ‘펀드 산업은 여전히 남성의 세계’라면서 ‘젠더 다양성 면에서는 20년 전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고 진단했다. 여성 펀드매니저의 비율이 낮은 수준에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비율은 2000년 말에 14%로 조사되었는데, 2019년 말에 업데이트했을 때도 여전히 14%에 머물렀다.
모닝스타 영국 팀도 재미있는 리서치를 했다. 〈데이브들(Daves)이 운용하는 펀드가 여성이 운용하는 펀드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많다〉라는 보고서로 여성 매니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불균형 현상을 ‘깔끔하게’ 설명했다. 영국 펀드 중 데이비드(David)나 데이브(Dave)라는 이름의 매니저가 운용하는 펀드는 108개인데, 여성 이름으로 운용되는 펀드는 다 합쳐도 105개뿐이라는 것이다. 영국식 유머 코드가 반영된 리서치인 것 같은데,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울 수도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