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more boys’ club, 금융계 ‘걸크러시’ 바란다

영주 닐슨 성균관대학교 글로벌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세계 금융의 수도 월스트리트에서 15년 이상 시스템 트레이더와 포트폴리오 매니저로 활동했다. 닐슨 교수는 자신의 혹독했던 직장 생활과 그에 앞서 인내로 버틴 학업 경험을 들려주면서, 여성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 분야에서의 커리어를 추천한다. 그 이유로 자신이 월가에서 얻은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꾸준히 잘하면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둘째는 평가에 따른 보상, 보상이 쌓여 이루어진 재정적인 안정, 그리고 엄청난 자유다. 그는 금융 분야 커리어와 결혼의 상충 관계를 둘러싼 고민과 선택도 공유한다.


“나한테 결혼하자는 말만 안 하면 우리는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드라마 속 대사가 아니다. 내가 남편과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 한 말이다. 남편은 아직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당시에 내가 정말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 특히 여성들은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대충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좀 더 내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사람들이 얻기 어려운 것을 ‘로망’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일단 말이라도 이렇게 해두는 게 이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점을 알 만큼 이미 성숙했다. 그런데 솔직히 단호하게 내뱉은 이 문장은 소위 ‘밀당’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내게 ‘결혼’이라는 단어는 이런 것이었다. ‘내가 일에서 간혹 보는 여자들 대부분은 하지 않는 것.’ 그리고 결국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나 자신을 버려야 하는 것.’

비혼이 많아지는 추세고 한국의 많은 여성이 결혼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를 알지만 뭐 이렇게까지 표현하느냐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이제부터 내가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야기해보겠다. 독자들은 이야기를 끝마칠 때까지 결혼에 대한 나의 정의가 심한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을 유보해주길 바란다. 다만 그 전에 알려줄 사실이 있다. 살짝 배신감이 드는 결론이기는 하지만 앞서 밝혔듯이 현재 나에게는 남편이 있다.

1990년대 월스트리트의 퀀트에 입문

지금은 상당히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지만, 2000년 이전에도 월가는 숫자를 잘 다루는 사람을 좋아했다. 단순히 더하기, 빼기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과 통계학을 잘하고 더 나아가 엑셀과 데이터베이스는 물론 프로그래밍이 능숙한 사람을 좋아했다. 내가 공부를 마치던 무렵인 1990년대에 이미 월가에서는 D.E.쇼(Shaw) 등의 큰 회사가 퀀트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고, 퀀트라는 용어도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업계 내 퀀트의 비중이 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터를 구입하고 이를 이용해 분석하는 작업은 투자자 대부분이 굉장히 보편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투자은행의 주니어 애널리스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엑셀을 뜯어고쳐서 여러 번 계산한다거나, C나 자바(Java), 때로는 R을 사용해 이것저것 계산하는 일로 보냈다.

게다가 지금처럼 실리콘밸리에 엄청난 테크회사가 있어서 이런 스킬 세트를 가진 인력을 마구마구 비싼 연봉으로 흡수하는 시기가 아니었다. 금융을 좀 알고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연봉으로 효용을 최대화할 수 있는 곳은 단연 ‘월가’였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첫 직장에서, 다른 분야에서 일했다면 족히 5~10년, 때로는 평생을 일해야 도달할 수 있는 연봉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렇다 보니 경쟁이 만만치 않았다. 애초에 이런 스킬 세트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많은 인내심과 즐거운 유혹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나는 월가에 가기 전에 통계학습론(statistical learning)이라는 분야를 연구했고 통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가 인공지능이었는데,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을 수정해 기능을 향상시키고, 부트스트랩 애그리게이션(bootstrap aggregation) 또는 배깅(bagging)이라고 불리는 방법을 적용해서, 미국 주식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음번 수익을 예측하는 내용이었다.

인공지능 공부를 원시적인 방법으로 해내다

지금 들으면 이미 1990년대에 안목이 있어서 이런 공부를 했구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 당시에는 뭘 해서 박사학위를 받아야 할지 몰라서 그냥 닥치는 대로 했다. 게다가 인공지능 등의 방법은 많은 경우 데이터와 코딩을 통해 시뮬레이션 등을 하는 분야지, 수학 이론으로 정확히 멋지게 증명하고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따라서 박사학위를 받기도 전에 무슨 법칙을 증명하고 월가에 온 천재들 앞에서는 정말 학위 논문을 뭘 썼는지 숨기게 되는 분야였다. 그리고 실제로 박사학위를 위해서 뭘 했는지 이야기할 기회는 2015년 이전에 거의 없었던 것 같다. 2015년 즈음을 중심으로 세상이 엄청나게 바뀌었다. 최소한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으로는 말이다.

문제는 이렇게 천재들 앞에서는 이야기도 못 꺼낼 주제를 공부하기까지도 나는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통계학 박사는 멋지게 데이터를 분석해서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하기 전에 수도 없이 많은 수학 법칙을 증명하는 숙제를 해야 한다. 많은 경우, 한 문제를 풀기 위해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거의 일주일을 끙끙댄 적도 있었다. 남들처럼 새로운 법칙을 만들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다 증명해놓은 문제를 한 번 풀어보는 데 말이다. 혼자 풀려고 애쓰다 정 안 되면 포기하고, 도서관 사다리에 걸터앉아 비슷한 문제를 풀어놓은 논문이 있는지 하나하나 뒤져보는 일을 수없이 반복했다. 찾아서 힌트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해보았다. 지금처럼 논문을 인터넷에서 PDF로 찾아볼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기에 정말 엄청난 노동이었다. 새벽부터 자정까지 한동안 매일매일 이 짓을 했다. 박사과정 학생이 화이트보드에 쭉쭉 수식과 숫자를 써서 멋지게 증명해나가는 모습은 영화에서나 봤다. 현실에서 직접 내 눈으로 본 건 바클레이즈(Barclays Global Investors)라는 한때 최대의 퀀트 투자회사에 다닐 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문제를 풀어낸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렇게 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매우 좋게 남아 있는데, 그저 돈 안 들이고 다른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기에는 최고의 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행히 프로그래밍은 남들보다 쉽게 했다. 그나마 내가 지도교수한테 쓸모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당시에는 내 삶을 그다지 쉽게 만들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집에 있는 컴퓨터로 하루 이틀이면 할 일을, 그 당시에는 컴퓨터 30대가 있는 랩을 빌리고 이를 연결해 한 달 내내 시뮬레이션을 해야 했다. 물론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몇 번을 했는지도 기억에 없다. 논문을 쓰는 일 역시 엄청난 참을성을 요구했다.

그래도 다행히 같은 작업을 생각하지 않고 반복하는 일을 남들보다 잘했다. 이 인내는 후에 두고두고 쓸모 있는 자산을 쌓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