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가 있는 것은 성장하고, 성장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경제가 위기에 빠지면 반사적으로 성장주 투자로 난관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이런 가운데 근래 버핏의 행보도 표면적으로는 성장주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제 버핏을 가치주 투자자가 아니라 성장주 투자자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신진오 밸류리더스 회장은 답을 찾기 위해 버핏의 스승이자 가치투자의 주창자인 벤저민 그레이엄으로 돌아간다. 신 회장은 그레이엄이 원칙적으로 선호한 종목은 성장주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만 대공황과 같은 심각한 위기 상황이나 비우량주의 경우에는 저PBR로 이해되는 가치주에 투자하는 것도 괜찮다고 설명한다.
고평가된 종목의 주가는 더 오르고 저평가 종목은 부진한 현상이 이어진다. 불확실성이 클수록 저평가주에 투자해야 한다는 ‘가치투자’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통상 밸류에이션이 높으면 주가 조정이 이뤄지고, 밸류에이션이 낮은 종목에는 자금이 몰리면서 주가가 오르는 것과는 반대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카카오의 예상 PER은 58배에 달하지만 이달 주가는 34%나 급등했다. 반면 삼성전자의 PER은 11.15배에 불과하지만 이달 주가는 2.5% 하락했다. 이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S&P 500 Pure Value는 이달 2.2% 하락한 반면 S&P 500 Pure Growth는 5.1% 올랐다. (머니투데이 2020년 5월 25일 자)
2020년 3월 11일 WHO는 코로나19에 대해 팬데믹을 선언했다. 팬데믹이란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로 WHO가 정한 최고 경고 등급인 6단계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매도 클라이맥스(Panic Selling)가 발생하면서 MSCI 월드 지수는 2월 19일 2,434.95에서 3월 23일 1,602.11로 34%나 급락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코스피는 2월 14일 2,243.59에서 3월 19일 1,457.64로 35%나 급락했다.
코로나19 사태와 주식시장 동향(2020/02~2020/06)
이렇게 증시가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가 잠시 지나가는 정도로 가벼운 감기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외출 및 이동 금지령이 내려지고, 일부 도시에 봉쇄령이 내려지는가 하면, 학교, 공항, 영화관, 체육시설 등 다중이용시설과 수많은 상점이 문을 닫는 등 사회 및 경제가 ‘잠시 멈춤’을 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러한 ‘잠시 멈춤’이 펀더멘털이 튼튼하지 못한 중소기업이나 영세한 개인사업체에는 ‘뇌성 마비’가 될 정도로 치명적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실업이 증가하고 소규모 상점과 식당은 임시 휴업을 하고 있다. 이 사태가 조금만 더 길어지면 대규모 실업과 경기 침체가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다.
증시의 민감한 반응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심각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아무리 암울한 상황이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 인간의 장점이다. 발이 묶여서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먹는 문제는 해결해야 하고, 서로 대면하지 않으면서도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인터넷을 활용한 쇼핑, 영화, 공연, 강의, 회의 등과 관련된 비대면(Untact) 주식으로 투자자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바이러스 감염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치료제와 예방약을 기대하면서 바이오 업체에 희망을 걸고 있다. 이런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된 인터넷과 바이오 관련 주식을 시작으로 주가는 폭락세를 멈추고 반등에 불씨를 댕겼다.
이 사태가 장기화되고 그 결과 경기 침체의 골이 깊어질 것이라고 예측한 전문가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가는 보란 듯이 V자 반등을 이루며 폭락 직전의 수준을 거의 회복했다. 구체적으로 MSCI 월드 지수는 3월 23일 1,602.11에서 6월 8일 2,288.04까지 43% 반등했고, 코스피는 3월 19일 1,457.64에서 6월 10일 2,195.69까지 51% 반등했다. 다행스럽게도 코로나19의 신규 확진자가 감소하고 안정권에 접어들면서 팬데믹 현상은 조만간 종료될 것으로 기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별로 지역 감염이 근절되지 않고, 한국에서도 10명 이내로 감소했던 하루 신규 확진자가 다시 50명대로 늘어나면서 ‘2차 대유행’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번 V자 반등은 이러한 경제 펀더멘털에 미치는 심각한 충격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낙관적인 면이 없지 않다는 경계심도 증가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시간이 문제일 뿐 언젠가 종료될 이벤트라는 생각에 기대어 너무 섣부르게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제기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전반적으로 실물 경제가 정상화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현실 인식이 공유되었다. 사실 최근의 경제 상황으로만 놓고 본다면 이익은 고사하고 급격한 매출 감소가 발생했으므로 반등은커녕 추가 급락이 진행되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가치주를 디스하고, 성장주를 플렉스해버렸지 뭐야!
언젠가 극복되고 정상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대입하면, 이렇게 비관적인 시기야말로 절호의 매수 기회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난제는 정상화될 때까지 죽지 않고 생존한 사람에게만 치킨 게임의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승자독식의 보너스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단기적인 고통과 장기적인 희망이 혼재한 가운데 자신의 체력에 따라 다른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 시기다.
저금리 저성장은 고사하고 마이너스 금리 마이너스 성장의 시기에는 성장이 더욱 귀한 법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불경기 시기에 성장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서슴지 않는 성장주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반대로 정상적인 호경기 시기에는 지나친 투자를 자제하고 보수적인 경영을 유지하는 가치주가 빛난다. 실제로 불경기 약세장에서 성장주의 비중을 높이고 반대로 호경기 강세장에서 가치주 비중을 높이는 리밸런싱을 진행하면 상당한 투자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을 힙합 래퍼들은 이렇게 표현할 것 같다. “가치주를 디스하고, 성장주를 플렉스해버렸지 뭐야!”
글로벌 경제침체 장기화가 이미 기정사실화된 마당에 가치투자가 될까? 현 상황은 기존 가치투자의 출발점이 아니라 종착점이 될 수 있다. 글로벌 저금리화가 장기화되고, 투기 세력이라도 잡기 위한 각종 규제 철폐가 잇따를 경우 서브프라임보다 더 큰 재앙을 부를 수 있기에 가치투자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대세상승장에서야 그야말로 ‘묵혀둬야 제맛’인 가치투자가 빛을 발휘했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가치투자란 빛바랜 옛말에 지나지 않는다. 가지고 있을수록 손실 위험만 커지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시아경제 2009년 2월 10일 자)
경제가 위기에 빠지면 반사적으로 성장주 투자로 난관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가치투자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대두되었다. 앞서 1997~1998년의 외환위기 때에도 정부가 앞장서서 스타트업 기업들을 전폭적으로 육성하면서 IT 닷컴 기업들을 중심으로 코스닥 버블 장세가 만들어졌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도 비대면 IT주와 바이오주를 중심으로 힘찬 반등에 성공했다.
1세대 가치투자자들은 외환위기 이후 주가가 폭락해 싼 주식이 사방에 널려 있던 2000년대 초반 가치투자 열풍을 타고 부상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반도체 등 대형주와 바이오 랠리에서 소외되며 펀드 수익률이 곤두박질쳤고, ‘가치투자의 위기’라는 지적이 나왔다. 최근엔 투자 철학은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2세대 가치투자자들이 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가치주뿐 아니라 성장 가능성이 있는 회사에도 투자한다. IT, 바이오 업종에 대한 편견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한국경제TV 2020년 6월 4일 자)
최근에 또다시 여의도 가치투자자의 세대 교체가 화제가 되고 있다. 투자철학은 유지하되, 전통적인 가치주뿐 아니라 성장 가능성 있는 회사에도 투자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구체적으로 IT와 바이오 주식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기의 해결사로 등장하는 이들 성장주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업력이 길지 않은 새로운 비즈니스의 신기술 관련 스타트업 기업들이다. 기존 비즈니스가 힘들기 때문에 새로운 비즈니스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둘째, 아직 순이익은 물론이고 매출도 정상적으로 발생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즉, 정상적인 가치 평가를 할 수 없다. 기존 비즈니스도 경제위기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가치 평가가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체력 측정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위기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가치 평가 방식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셋째, 매출이나 이익이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인 ‘성장주’는 아니고 ‘성장 기대주’라고 말해야 맞는 표현이다. 전통적인 투자 영역에서 정상적인 투자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니 영역을 확장해 새로운 종목을 찾아보는 게 참신한 궁여지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