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주회사 저평가의 해법
가치투자자들은 지주회사의 극심한 디스카운트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아왔다. 이를 극복하려면 먼저 원인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원인 중 하나는 예측 가능성 훼손이다. 예컨대 종속회사·관계회사라고 공시해놓고 갑자기 시가평가하는 등의 행태가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훼손한다. 그로 인해 시장의 보수적인 가치평가가 초래된다. 필자는 지주회사는 최소한 공시한 회계 정보와 자신이 제시하는 가치평가 모형, 배당정책을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영미와 같이 상장 종속회사를 공개 매수해 비상장으로 만드는 등의 방법을 제시한다.
순수지주회사의 저평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중에서도 유독 심한 현상이다. 한국 주식시장에서 자회사와 동시 상장된 순수지주회사의 주식이 기업 가치 대비 매우 저평가되어 있다는 점은 여러 논문에서 밝혀진 바 있다.1
가치투자자들은 지주회사의 극심한 디스카운트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아왔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지주회사들이 극심한 디스카운트를 받는 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기업 거버넌스와 자본시장의 공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지주회사 관련 법 제도와 관행이다.
나는 변호사를 하다가 투자업으로 이직했다. 투자 관련 지식은 대부분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다 보니, 교과서와 다르거나 법적 관점에서(변호사로서) 동의할 수 없는 관행, 특히 주주 권리를 침해하는 자본시장의 관행에 의문을 품었고, 이 의문이 풀릴 때까지 수용하지 못했다. 이하 내용은 그 과정에서 품었던 의문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배운 것들을 정리한 것으로서 주로 선진국 입법례와 비교했다. 나는 아직도 의문 대부분을 해결하지 못했고 여전히 배우고 있다는 점을 널리 양해해주기 바란다.
들어가며
지주회사든 종속회사든 일반적으로 선진 자본시장에서는 공정가치라는 동일한 가치평가 방법을 적용한다. 국제회계기준(IFRS)을 쓰는 유럽이나, 일반회계원칙(GAAP)을 쓰는 미국이나 모두 가치평가의 모형은 공정가치다. 기업 가치는 수익가치와 자산가치로 분류되는데, 수익가치는 위험 수준에 맞는 할인율, 예측 가능한 성장률 등의 변수를 도출해 현금흐름할인(DCF)하거나 기업가치/상각전영업이익(EV/EBITDA), PER 등 적정 멀티플을 산출하는 방식을 쓰고, 자산가치는 장부가를 원칙으로 한다. 주주 가치는 이렇게 구해진 기업 가치에 주주환원율을 곱한 값이다.
지주회사라고 특별한 평가 방법은 없다. 다만 자회사 투자 주식을 다시 공정가치로 평가해 모회사의 자산가치에 더하는 절차가 있을 뿐이며, 자회사 투자 주식 역시 공정가치로 평가하기 때문에 결국 다른 평가 방법은 없다. 글로벌 자본시장은 회계기준이 제공한 정보를 가지고 참여자·투자자들이 적정한 공정가치·내재가치를 찾아가는 합의 과정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위와 같은 공정가치 평가법이 일관되지 않는다. 특히 (상장 계열사가 포함된) 계열사 간 합병 또는 주식 교환, 상장사에 대한 공개 매수, 경영권 지분 양도 등 자본 거래에서 수익가치와 자산가치를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한다. 후술하겠지만 우리 회계기준에는 법적 구속력이 있고, 실제로 자본 거래에서 가치평가의 결정 기준으로 작동한다. 이런 규제 체계를 가진 나라는 전 세계에 한국뿐이다. 지주회사 가치평가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같은 맥락에서 회사가 제공하는 회계 정보와 그 회사가 제시하는 가치평가 모형, 배당정책이 일치하지도 않는다. 예측 가능성이 현저히 훼손된다. 이렇게 되면 시장은 그중 가장 보수적인 평가법을 선택하게 된다. 이것이 지주회사 디스카운트 현상이다.
한국의 지배주주는 희한한 규제 체계를 이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자본 거래를 왜곡하는데, 자본시장의 투자자들은 공정가치·내재가치 평가와 전혀 다른 규제 체계의 특수성을 알기 어렵고, 이런 규제 체계의 특수성을 잘 아는 법률 전문가들은 거꾸로 이런 규제 체계가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 공정가치·내재가치를 찾아갈 수 있는지 알기 어렵다. 자본시장의 원리와 규제 체계의 특수성을 모두 이해해야 지주회사의 디스카운트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다. 이하에서 살펴본다.
지주회사에 관한 입법례 비교
한국의 지주회사와 지배력
한국의 지주회사는 주식의 소유를 통해 국내 회사의 사업내용을 지배하는 것을 주된 사업으로 하는 회사로서 자산총액이 5천억 원 이상이고 소유 자회사의 주식 가액의 합계액이 지주회사 자산총액의 100분의 50 이상인 회사이다(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법) 제2조 7호). 이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주회사는 순수지주회사를 의미한다.
자회사를 ‘지배’한다는 개념은 공정거래법 시행령 제4조와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이하 외부감사법)에 정의되어 있다. 외부감사법은 연결재무제표를 ‘지배회사가 종속회사에 대해 작성하는 재무제표’라고 정의하고(제2조 7호), 그 시행령은 지배회사란 ‘경제 활동에서 효용과 이익을 얻기 위하여 종속회사의 재무정책과 영업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경우’라고 정의한다(제3조 제1항).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상으로 지배력이란 과반수 지분율을 갖거나 법령이나 계약 등에 의해 ‘이사회의 과반수를 선임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지배회사는 연결재무제표 작성을 위해 필요한 범위에서 종속회사의 회계에 관한 장부와 서류를 열람 또는 복사하거나 회계에 관한 자료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고, 종속회사의 업무와 재산상태를 조사할 수 있다(제7조).
그런데 이 외부감사법과 K-IFRS와 공정거래법 제4조의 지배력 기준이 다르다. 공정거래법 제4조는 지분율 30% 이상(특수관계인 포함)이고 최대주주이거나(1호) 지분율 관계없이 실질적으로 사업을 지배하는 경우(2호)까지 지배력이 있다고 보아서 K-IFRS보다 훨씬 완화되어 있다. 다만 2호의 경우 모회사가 지주회사로 전환되면 상장 종속회사의 지분율을 30% 이상 취득하여야 한다(공정거래법 제18조 제2항 2호).
정리하면 지주회사의 지배력은 자회사의 재무정책과 영업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인데, 외부감사법과 K-IFRS상으로는 지분율 50%를 넘는 등 ‘이사회 과반수를 선임하는 능력’을 의미하지만, 공정거래법은 그 외에 재무정책과 영업정책에 개입하고 ‘실질적으로 결정’하면 지배력을 인정한다. 다만 공정거래법은 지주회사로 전환되면 상장 종속회사 지분율을 30% 이상 취득하도록 요구한다. 즉, 회계기준과 지배력 기준이 다르다.
지주회사에 관한 입법례
주지하다시피 영국, 미국, 유럽에는 지주회사(혹은 모회사)의 종속회사 지분율 규제가 없고 자회사 이익·자산과 합산하는 IFRS(혹은 GAAP) 회계기준만 있으므로 한국의 외부감사법(K-IFRS)과 같은 태도다. 지배력은 50% 이상의 지분율 등 ‘이사회 과반수 선임 능력’이고, 지주회사는 지배력을 가진다. 즉, 회계기준과 지배력 기준이 일치한다.
다만 연결 대상 종속회사에 대해서 대부분 80% 이상 지분율을 확보한다(미국의 연결납세제도는 모회사가 자회사 지분을 80% 이상 확보한 경우에 적용되고, 프랑스는 95%를 요구한다). 50%만 확보해도 되는데 80% 이상 확보하는 목적은 종속회사의 자산과 이익을 합산해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함과 동시에 모자회사의 세금에 연결납세제도를 적용하려는 것도 있지만, 주로 모회사와 자회사 간의 이해 충돌로 인한 주주 소송을 차단하는 데 있다.
문제점
우선 외부감사법·K-IFRS 회계기준과 공정거래법상 지배력의 정의가 다르고 예측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 문제다. 영미, 유럽은 회계기준과 지배력 기준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예측 가능성이 높다. 우리와 가장 유사한 입법례가 일본인데, 일본조차도 50%+1주를 확보해야 지주회사로 인정한다.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규정 역시 지분율이 50% 이상인 경우 지배력을 인정하고 이사회 독립성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영미, 일본의 기준에서 볼 때 한국의 지주회사(특히 상장 종속회사의 지분율이 30% 남짓인 경우)는 지주회사가 아니고 익금불산입 혜택을 받는 투자회사에 불과하다.
실제로 LG는 주요 상장 자회사인 LG화학(33%), LG생활건강(34%), LG전자(33%), LG유플러스(37%)를 종속회사가 아니라 관계회사로 분류하고 있으며, 한화 역시 한화에어로스페이스(33%)를 관계회사로 분류한다.2 다만 SK는 SK이노베이션(33%), SK텔레콤(30%), SK스퀘어(30%), SK네트웍스(42%), SKC(40%) 등 대부분의 상장 자회사를 종속회사로 분류하고 있다.
종속회사 회계원칙에 관한 입법례와 문제점
기업 재무제표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보를 담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명확하며 공정하게 작성하고 공시해야 한다.
입법례 비교
영미계의 회계기준은 민간 기구인 재무회계기준심의회FASB에서 제정하는 GAAP의 일부이고, 법 체계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즉 영미,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재무제표상의 정보와 데이터는 가치평가의 재료일 뿐이고, 그 자체가 가치평가를 의미하지 않으며, 사인 간의 거래를 구속하지도 않는다. 투자자들은 재무제표상의 정보와 데이터를 가지고 각자 내재가치·공정가치를 산출하고, 시장에서 가격을 통해 자유롭게 의사를 교환하고 합의한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 회계기준은 상법과 외부감사법에 근거를 둔 법 체계의 일부로 법적 구속력을 가진다. 상법은 일반적으로 공정하고 타당한 회계관행에 따른다고 규정(제446조의2)하여 GAAP를 수용하고 개별재무제표를 원칙(제447조 제1항)으로 하고 연결재무제표를 예외(동조 제3항)로 하지만, 그 특별법인 외부감사법은 금융위원회가 결정하되 회계처리기준을 한국회계기준원에 위탁하고 있고(제5조 1항, 4항), 필요할 경우 한국회계기준원에 회계기준의 수정을 요구할 수 있게 규정한다(동조 제5항). 한국회계기준원은 K-IFRS를 규정하므로 결국 K-IFRS가 금융위원회 규정처럼 기업회계의 기준으로 법적 구속력·규범력을 갖는다. K-IFRS는 연결재무제표를 원칙으로 하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회사는 연결재무제표를 주재무제표로 공시해야 한다.
특히 우리 자본시장법은 상장회사와 비상장회사의 합병 비율을 결정할 때 상장회사는 자산가치를 선택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데,3 대법원은 공시된 재무제표의 자산가치를 기준으로 하고 당사자가 별도로 산출한 자산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회사가 공시하는 재무제표상의 정보와 데이터가 사인 간의 합병 거래를 구속하는 법규로 기능하고, 결국 회사가 재무제표 공시로써 법 규정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게 매우 특이한 입법 태도이며, 합병 비율을 당사자 간의 합의가 아니라 재무제표상의 숫자에 구속시키는 입법례는 한국이 유일하다.
이러한 입법 태도에서 기업 가치평가가 필요한 자본 거래에 K-IFRS가 어느 범위의 규범력·구속력을 갖느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재무제표를 단순한 정보 제공이 아니라 법 규정에 대한 사법 통제 관점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K-IFRS의 종속회사 회계원칙
그런데 2011년에 K-IFRS가 도입되기 전, 즉 K-GAAP하에서는 회사가 자회사 주식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을 임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매우 좁았다. K-GAAP 기업 회계원칙으로는 개별재무제표(현행 별도재무제표)에서 자회사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종속회사, 관계회사)에는 지분법으로 주식 가치를 평가하고, 그 외의 주식은 공정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면 공정가액법으로, 공정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면 원가법으로 평가해야만 했다(연결재무제표에서 종속회사는 합산). 그러나 K-IFRS가 도입되면서 별도재무제표에서 보유한 종속회사나 관계회사 투자 증권의 가액을 원가법, 공정가액법, 지분법 중에서 ‘임의 선택’해 평가할 수 있다(연결재무제표에서 종속회사는 합산). 즉, 별도재무제표 작성 관련해 K-GAAP에서 원가법, 공정가액법, 지분법을 적용하는 유형이 정해져 있었다면, K-IFRS에서는 회사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
2011년 경제개혁연대의 질의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지주회사의 요건을 판단하는 자산은 별도재무제표를 기준으로 한다고 답변했고, 실무에서 상법상 배당가능이익, 법인세법상 손금한도·수입금액 등은 별도재무제표를 기준으로 한다.
문제점
결국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위원회는 K-IFRS를 통해서 회사가 지주회사 전환 여부를 임의로 선택하도록 허용하는 것과 같다(원가법을 사용하면 지주회사 편입 회피가 가능함). 예컨대 DB아이엔씨는 애초에 DB하이텍을 관계회사로 편입하고 원가법을 채택해 지주회사 전환을 회피할 수 있었다(현재는 종속회사, 관계회사가 아니라 단순 투자 증권, 즉 회계상 기타포괄손익-공정가치측정금융자산으로 인식해서 시가평가해야 되므로 DB아이엔씨는 지주회사로 강제 전환됨).
그뿐만 아니라 상장·비상장 계열사의 합병 비율을 산출할 때에도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 연결재무제표와 별도재무제표를 선택할 수 있고, 별도재무제표에서도 종속회사·관계회사의 자산가치 평가를 위해 원가법, 공정가치법, 지분법을 임의로 선택할 수 있게 허용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상법, 외부감사법, 자본시장법에 따라 상장회사의 합병 비율을 결정할 때 재무제표(자산가치)가 법규처럼 기능하고 투자자를 직접 구속하는데, 위와 같은 관행이 공정한지 의문이다. 별도재무제표에서 원가법, 공정가치법, 지분법을 임의로 선택한다면 결국 지배주주가 합병 거래에서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시장 참여자(주주, 채권자 등)의 예측 가능성이 현저히 훼손되기 때문이다.
영미계와 유럽, 일본의 가치평가 기본은 전술한 바와 같이 공정가치법이다. 따라서 한국도 사인 간의 합병 비율을 구속하는 자본시장법 규정과 회계기준을 금융위원회가 관리·통제하는 규정을 폐기하고, 시장 거래는 당사자 간에 자유롭게 공정가치·내재가치에 따라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공정가치법에 의해 가치평가를 수행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예컨대 별도재무제표상 원가법이나 지분법)에는 이를 원용하는 당사자가 특별한 사정을 입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러한 선택이 일반 주주의 권리를 침해하고 대주주의 이익을 도모하는 목적이라면 결코 허용될 수 없다. 예컨대 동원엔터프라이즈와 동원산업의 합병 비율을 결정할 때 양사는 연결재무제표가 아니라 별도재무제표를 사용했고, 별도재무제표에서도 동원엔터프라이즈의 종속회사는 공정가치법, 동원산업의 종속회사(스타키스트)는 원가법으로 장부에 계상했는데, 이는 동원엔터프라이즈와 그 대주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선택이다. 당연히 동원산업도 공정가치법을 채택해야 했다.4
만일 현행법을 유지하면서 위와 같이 공정가치법을 일관되게 적용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회사가 제공한 회계 정보와 그 회사가 제시하는 가치평가 기준이 일치해야 한다. 종속회사로 분류했으면 가치평가도 연결재무제표상의 합산 이익·자산을 기준으로 해야 하고(관계회사는 지분법 평가), 매도가능증권으로 분류했으면 가치평가도 시가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 투자자는 재무제표상의 정보와 데이터를 원용해서 자유롭게 가치평가를 할 수 있으나, 회사는 자신이 공시한 재무제표상의 정보와 데이터에 구속된다고 해석해야 한다(특히 상장회사 합병 거래).
예컨대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에 대해서 지배력이 없다고 하고 매도가능증권으로 분류했는데, 그렇다면 삼성물산의 가치평가에서도 삼성전자의 가치를 시가 평가해야 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 관련해서 국제의결권자문기구ISS는 삼성전자 주식을 시가 평가했으나 국내 일부 투자기관은 매도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시가 평가에 의문을 제기했는데, 회계 정보는 매도가능증권으로 시장에 제공하고 가치평가는 매도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또 동원엔터프라이즈는 동원시스템즈를 종속회사로 분류했으므로 가치평가도 연결재무제표상의 합산 이익·자산을 기준으로 해야 하지만 동원시스템즈의 주식을 시가 평가했다.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 우리 외부감사법에 의해서 회계기준에 법적 구속력까지 부여되어 있다는 점을 깊이 고려할 때, 만일 회계 정보와 다른 가치평가 기준을 내세우려면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반복하지만 영미처럼 공정가치법을 일관되게 적용하든지, 아니면 회사가 시장에 제공한 회계 정보와 가치평가 기준이 일치해야 한다. 공정가치법도 아니고 정보와 기준이 일치하지도 않으면 결국 지배주주가 회계기준과 가치평가법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투자자의 예측 가능성을 현저히 훼손하게 된다. 이것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의 원인이요, 그중에서도 극심한 지주회사 디스카운트 현상의 원인이다.
상장회사 주주 보호를 위한 이사회 독립성 요건
비상장회사의 주주는 주주 간 계약을 통해서 소수주주권을 보호받지만,5 상장회사의 주주는 불특정 다수이기 때문에 일일이 주주 간 계약을 체결할 수 없으므로 엄격한 이사회의 독립성을 통해 보호받는다. 이사회의 독립성이란 이사회가 대주주와 경영진으로부터 독립하여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하여” 선관주의의무 및 충실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상장회사의 이사회 독립성은 글로벌 자본시장의 철칙이고, 입법례에 따라 법률에 규정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거래소의 상장(유지) 조건과 법원의 사후 통제 방식으로 관철된다.
이를 위해 예컨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는 2003년 상장 규정을 대폭 개정해, 대주주와 경영진으로부터 독립된 독립 이사를 상장회사 이사회의 과반수 선임해야 하고, 독립 이사만으로 구성된 지명·기업거버넌스위원회 및 보수위원회를 설치해야 하며, 독립 이사는 지명·기업거버넌스위원회에서 추천한 사람 중에서 선임할 것을 요구한다. 상장회사의 이사회 독립성 요건이 아주 엄격하다.6
델라웨어주 형평법원(The Delaware Chancery Court)은 소위 오라클 사건에서, 이사의 독립성을 판단할 때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간적 관계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판결함으로써 엄격한 기준을 정립했다.
지주회사와 종속회사 동시 상장의 문제점
지배력과 이사회 독립성의 충돌
전술한 바와 같이 지배력이란 지주회사가 종속회사의 영업정책과 재무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고, 법적으로는 처분권과 유사한 개념이다. 그런데 지주회사는 종속회사에 대해서 지배력을 가지므로 종속회사의 이사회는 ‘지주회사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따라서 상장회사의 이사회 독립성 개념과 본질적으로 모순이며 충돌한다.
이와 같은 충돌을 고려해서 예컨대 뉴욕증권거래소는 모회사의 지분율이 50% 이상인 피지배회사(controlled company)에 대해서는 이사회 독립성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 예외를 인정했다.
지배력과 신인의무의 충돌
그러나 위와 같이 예외를 인정하면 지배력 남용에 따라 소수주주의 권리가 침해될 위험이 있으므로,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 미국의 법원은 일정한 경우 소수주주에 대한 지배주주의 신인의무를 인정하고 있다. 예컨대 대주주가 프리미엄을 받고 약탈적 양수인에게 지배 주식을 매각한 경우, 지배주주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주주를 축출(squeeze-out)하는 경우, 내부 정보를 유용한 경우 등이 대표적이지만 지배적 의결권을 남용해 소수주주의 권리를 침해한 경우 포괄적으로 인정한다.7
이에 따라 영미계에서는 지주회사와 종속회사가 동시 상장을 유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50% 이상의 지분율을 확보하면 이사회 독립성 요건에서 제외됨에도 불구하고 지배력 남용과 신인의무 위반을 이유로 끊임없이 소송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모회사가 물적 분할(carving-out)한 자회사를 동시 상장(신주 발행하지 않고 구주 매출함)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대부분 오래지 않아 자회사 지분을 모회사 주주에게 분배(spin-off distribution)해 동시 상장을 폐지한다.8
지배주주에 대한 경영 책임
영미에서는 이사회를 장악한 대주주가 CEO를 겸하거나 선임한 경우에도 주주환원율이 낮거나 경영 성과가 미흡하다면 임기 중이나 계약 만료 시 퇴임하라는 주주 요구를 무시하기 어렵다. 다양한 의결권 자문사들이 기업의 경영 성과를 검증하고 이사의 선임 여부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하는 데 큰 영향력이 있다. 특히 주주환원율이 오랫동안 낮으면 재선임 가능성이 낮아진다.
모자회사 동시 상장에서 주주 권리를 보호한 해외 사례
유럽과 일본에는 동시 상장이 유지되는 경우가 있으나 증권거래소는 모자회사 이해 충돌 여부를 모니터링한다. 일본에서는 위와 같은 모자회사의 이해 충돌을 피하기 위해 2020년 1월부터 9월 말까지 공개 매수 등을 통해 자회사 지분을 100% 사들인 뒤 상장폐지하는 사례가 15건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일본 최대 통신회사인 NTT는 자회사 NTT도코모에 대해 4조 2,000억 엔(약 46조 원) 규모의 공개 매수를 실시했다. 소니와 이토추상사도 금융 자회사인 소니파이낸셜홀딩스와 편의점 자회사인 패밀리마트 지분 100%를 확보하는 데 각각 4,000억 엔과 5,800억 엔을 투입했다고 보도된 바 있다.9
최근 자본시장연구원은 〈물적분할과 모자기업 동시상장의 주요 이슈〉 보고서에서, 주요 선진국에서 물적 분할과 쪼개기 상장을 명시적으로 규제하는 사례는 찾기 어렵지만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상장 규정을 통해 모자회사 동시 상장을 규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 거래소에서는 자회사가 자산과 영업범위의 중복성 심사를 통과해야만 상장할 수 있다. 또한 말레이시아 거래소는 2022년부터 모자회사의 지배 관계를 중단해야만 상장 신청이 가능하도록 규제 수준을 강화했다.
2022년 1월 이용우 의원이 주최한 ‘모자회사 쪼개기 상장과 소액주주 보호 - 자회사 물적분할 동시 상장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가 한국거래소 컨퍼런스홀에서 열렸다. 이 토론회에서 이수환 국회입법조사처 변호사는 “해외 사례처럼 우리도 상장 자회사를 유지하는 게 최적인지 정기적으로 점검하게 하고 투자자에게 관련 정보를 공개할 책임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 변호사는 “일본 도쿄증권거래소는 유가증권 상장 규정을 통해, 국내 상장주식이 주주의 권리를 부당하게 제한하는 경우 상장폐지한다”고 해외 사례를 들었다. 또 “미국 뉴욕증권거래소도 상장회사 매뉴얼을 통해, 보통주 기존 주주 의결권은 기업 활동이나 발행을 통해 이질적으로 축소되거나 제한될 수 없다는 규정을 두었다”고 소개했다.
우리 상장회사 규제와 문제점
우리 상법상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회사는 사외이사를 3명 이상으로 하되, 이사 총수의 과반수가 되도록 규정(제542조의8 제1항)함으로써 대기업 상장회사의 이사회 독립성을 요구하고 있지만, 학계와 법원에서는 사외이사는 독립이사가 아니라 회사 외부 이사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상법은 독립성 세부 기준에서도 경제적 이해 관계만 요구하고 있다(동조 제2항, 제382조 제3항). 한국증권거래소는 상장 조건으로 이사회 독립성을 요구하지만 요건이 글로벌 기준에 비해 엄격하지 않고, 법원 역시 상장 조건으로서의 이사회 독립성을 특별히 따지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상장회사에 대해서 지주회사의 지분율을 30% 이상만 요구하므로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해 너무나 완화되어 있고, 게다가 지주회사의 지배력은 인정되지만 우리 법원은 지배력의 남용을 통제할 수 있는 지배주주의 신인의무는 인정하지 않는다.
CEO를 창업자 가문의 후손이 경영 검증 절차 없이 승계하고, 관련 소송에서 증거개시제도 등 투자자를 보호하는 수단이 미비하기 때문에 경영 책임을 묻기 어려운 현실이며, 이에 따라 주주환원율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편이다.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는 종속회사 지분율 30%만을 요구하고, 종속회사의 동시 상장까지 허용하며, 나아가 지배주주의 신인의무도 인정하지 않고, 상장 종속회사 이사회의 독립성까지 형해화되어 형식만 남았다면 종속회사 일반 주주는 무슨 수로 보호받을지 깊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국증권거래소는 영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해외 사례를 참고해서, 상장기업 일반 주주 보호를 위해 상장 조건으로서의 이사회 독립성을 강화하든지 지배주주의 신인의무를 인정하든지 둘 중 하나는 도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