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주주의 인색한 주주환원 정책, 성장주 우대와 자산주 홀대, 의무공개매수제도 부재…. 한국 주식시장에 널리 만연한 디스카운트 요인 몇몇이다. 그러나 제도와 상황, 행동이 점차 바뀌고 있고, 저평가 주식이 제 가치를 찾게 해주는 ‘촉매’가 증가하고 있다. 행동주의 투자자의 움직임이 그런 촉매 중 하나다.
남양유업의 비극
트로이 목마
2022년 6월 7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457호. 남양유업 홍원식 회장에게서 주식을 매수한 한앤컴퍼니가 약속대로 주식을 인도해달라고 제기한 사건이었다. 증인석에 한 노신사가 섰다. 홍 회장에게 주식 매각 자문을 제공한 회사의 함춘승 대표였다. 변호사는 홍 회장이 함 대표에게 보낸 문자를 화면에 띄웠다. ‘트로이 목마’. 변호사는 “트로이 목마가 무슨 뜻인지 압니까?”라고 물었다.
도산공원 사거리는 대한민국의 고급스러운 거리 중 최상급으로 꼽힌다. 도산대로와 언주로에는 국산 차보다 수입차가 많다. 명품을 파는 가게와 고급스러운 음식점도 즐비하다. 오가는 사람들의 꾸밈새도 다르다.
이 사거리의 북서면에는 벤츠 전시장이 있다. 북동면에는 BMW 전시장이 있다. 남동면에는 현대모터스튜디오 서울이 있다. 이전에는 예쁘기로 소문났던 인피니티 전시장이 있던 곳이다.
마지막 남은 남서면 모퉁이에 남양유업 본사인 1964빌딩이 있다. 토지의 면적은 1,390m2(421평)이다. 이 토지와 바로 연이어 뒷골목으로 이어지는 토지, 즉 백미당빌딩이 있는 토지 340m2(103평)까지 더하면 모두 1,730m2나 된다. 모두 남양유업의 100% 자회사인 금양흥업이 소유하고 있다.
남양유업의 가치를 단순히 도산공원 사거리 본사의 부동산만 보고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업력이 오래된 기업은 장부가치 이상으로 우량한 자산이 많다. 남양유업은 세종, 천안, 경주, 나주 등에 공장을 두었는데, 이 중에선 오래되어 인근이 개발된 곳도 많다. 세종 공장만 하더라도 세종시에 인접해 있다. 그러나 남양유업의 주가는 작년 4월 불가리스 사태가 있기 전까지 하락하기만 했다. 보통주와 우선주를 더한 시가총액이 약 2,000억 원에 불과한 기간도 꽤 오래 지속되었다.
2021년 5월 27일 남양유업은 홍원식 회장과 특수관계인의 주식 37만 8,938주(52.6%)를 3,100억여 원에 한앤컴퍼니에 매각한다는 공시를 냈다. 매각 당시 남양유업 주가는 불가리스 사태 이후 다소 오른 상태였지만, 이 가격과 비교하더라도 거의 ‘100%’에 달하는 경영권 프리미엄이 붙은 가격이었다. 앞서 설명한 사건의 증인 함춘승 대표는 남양유업 홍원식 회장이 계약 체결을 앞두고 매우 기뻐했고, 한앤컴퍼니가 도망가지 못하게 확실히 계약서를 작성하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매각 공시가 나온 직후 언론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사람들이 ‘본사와 백미당빌딩의 부동산 가치만 해도 2천억~3천억 원은 족히 되지 않나?’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공시 이후 어느 정도 지난 뒤의 일이다. 홍 회장이 함 대표에게 바로 그 ‘트로이 목마’라는 문자를 보낸 것은 며칠 뒤였다. 거래 상대방이 보낸 간첩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가격과 가치
우리나라 상장기업의 지배주주들은 주가가 낮아지는 것을 좋아한다. 주가가 낮아야 3세, 4세 승계 과정에서 증여세와 상속세를 줄일 수 있다. 홍 회장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랬기에 배당금도 안 주느니만 못하게 매년 1,000원씩만 주었고, 주가가 100만 원을 넘을 때도 액면분할을 하지 않았으며, 주주 가치 제고 정책은 고사하고 평범한 투자설명회(IR)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승계를 염두에 두어서가 아니라 그저 인색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카산드라는 트로이 목마를 경고했으나 시민들은 무시했다. 남양유업 사건에서 트로이 목마는 제3자가 아니라, 스스로 제 가치를 평가하기 어렵게 장부를 작성하고 극단적으로 낮은 주가를 만든 홍 회장 자신일 수 있다.
남양유업 저평가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도산공원 사거리의 부동산 가치도 있다. 남양유업 본사와 백미당빌딩의 토지는 모두 남양유업 자회사인 금양흥업이 소유하고 있다. 금양흥업의 감사보고서에 의하면 금양흥업의 자본총계는 약 562억 원이고 이 중 토지 가치는 약 43억 원에 불과하다. 토지 가치를 시가의 수십 분의 1에 불과하게 계상해온 것이다.
가격이 가치를 밑도는 상황을 만들어 오랫동안 유지하다 보면, 지배주주조차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의 가치를 헷갈릴 수 있다. 홍원식 회장 역시 스스로 만든 극단적인 저평가 상황에 속아 가치 판단을 그르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자승자박적 현상을 대한민국 자본시장 고유의 ‘남양유업의 비극’이라 명명한다. 극단적인 저평가는 비지배주주만이 아니라 지배주주에게도 치명상을 안길 수 있다.
LG의 법칙
시멘트회사와 놀이공원을 거느린 지주회사
‘가격’만을 보고 ‘가치’를 외면하는 현상의 대표 격은 지주회사에 대한 평가다. 코로나19의 위기에서 풀려난 지금, 놀이공원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서울랜드라는 놀이공원을 자회사로 거느린 기업이 있다. 한일홀딩스라는 지주회사다. 한일홀딩스는 상장사인 한일시멘트도 지배하고 있다. 한일시멘트는 또 다른 상장사인 한일현대시멘트를 지배하고 있다. 과점적인 시멘트시장에서 두 기업의 합산 점유율은 1위다.
한일홀딩스의 2022년 6월 초 기준 시가총액은 4천억 원을 밑돈다. 회사가 보유한 한일시멘트 가치 약 8천억 원(시가총액 1.3조 원의 지분 60.9%)의 절반에 불과하다. 한일홀딩스에는 한일시멘트 외에도 다른 비상장 자회사의 지분과 막대한 현금, 장단기 금융자산이 있다. 그런데도 시가총액이 4천억 원이 안 된다.
할인의 할인의 할인의 할인
상장 지주회사의 시가총액이 상장 자회사의 시가총액에 미치지 못하는 현상은 만연해 있다. 다른 예로 LG를 들어보자. LG의 시가총액은 2022년 6월 초 현재 보통주와 우선주를 더해 12.8조 원 정도다. 그런데 LG가 거느린 상장 자회사 중 LG화학 보통주의 시가총액이 약 41.3조 원이니 LG의 LG화학 지분(30.06%) 가치만 해도 약 12.4조 원에 달한다. LG전자, LG생활건강, LG유플러스 등 다른 상장 자회사, LG CNS 등 비상장 자회사, LG의 현금과 부동산을 다 제외하고, LG화학 지분 가치와 LG의 시가총액이 비슷한 것이다.
손자회사까지 내려가면 더욱 심각하다. LG화학은 LG에너지솔루션 지분 81.8%를 보유하고 있고, LG에너지솔루션의 시가총액은 2022년 6월 초 현재 약 102조 원에 달한다. 그러나 LG화학 보통주의 시가총액은 앞서 말했듯 약 41.3조 원이고, 우선주를 더해도 약 43.5조 원에 불과하다. LG화학의 시가총액이 LG에너지솔루션 지분 가치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여기에 더해 국내 최고 수준의 화학 사업 가치, 첨단소재 사업과 생명과학 사업 가치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지주회사의 가치가 자회사 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자회사 가치가 손자회사 가치에 미치지 못하는 현상을 우스개 삼아 ‘LG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법칙이지만 우리 자본시장에서 LG의 법칙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니, 수년 사이 정도를 더해가고 있다. 비단 LG만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물산, SK, 한화 등 거의 모든 지주회사에서 비슷한 현상이 관찰된다. 이는 지주회사의 ‘가격’에 맞추어 ‘가치’를 정당화하려는 각종 논리가 등장하는 배경이다.
지주회사 가치 정당화의 논리
이 중에서 더블 카운팅(double counting)은 지주회사와 자회사가 모두 상장되어 있으면 시가총액이 2번 계산되니 지주회사의 시가총액이 줄어야 마땅하다는 논리다. 어감이 좋아서인지 널리 유행하지만 잘못된 논리다. 이 논리대로라면 비상장 자회사가 상장하는 순간 지주회사의 가치가 감소한다. 상장 전이나 후나 같은 사업을 하면서 같은 매출과 같은 이익률을 올리는데 굳이 가치가 감소할 이유가 없다. 상장하면서 자금도 유입되었을 것이니 더욱 그렇다. 게다가 더블 카운팅은 자회사가 아니라 지주회사만 할인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자회사의 가치가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상장 자회사의 이사회는 모기업이 아니라 모든 주주의 이익을 위해 작동해야 하고, 그래서 모기업의 통제권이 쉽게 미치지 못하기에 할인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당위’이지, 현실이 아니다. 모기업은 사실상 마음대로 자본을 배치하고, 사업 기회를 배분하며, 지주회사에 유리한 합병도 할 수 있다. 하림지주가 엔에스홈쇼핑을 합병한 사례나, 동원엔터프라이즈가 동원산업을 합병하려는 시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현금흐름으로 할인의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자회사가 100을 벌어 50을 유보하고 50을 배당하고, 지주회사 역시 자회사에서 벌어들이는 수입 50 중 25를 유보하고 25를 배당한다고 가정할 경우, 자회사의 주주는 100 중 50만큼 현금을 얻지만 지주회사의 주주는 25만큼만 얻으며, 여기에 세금 효과까지 더하면 현금흐름의 강도가 더욱 약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당장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 더 가치 있게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자회사와 지주회사에 유보되는 돈도 결국 주주의 몫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유보된 돈이 재투자되어 더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다. 심지어 유보된 돈이 낭비된다고 하더라도 전부 사라질 수는 없다. 전부 사라진다고 해도 최고 70%에 달하는 극심한 지주회사 디스카운트를 도저히 설명하지 못한다.
자회사를 처분하면 법인세를 내야 하니 지주회사가 할인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한일홀딩스는 2022년 2월 24일, 주력 자회사도 아닌 한일네크웍스의 주식 598만 9,532주(50.1%)를 1,030억 원에 처분한다고 공시했다. 1주당 약 17,197원으로 2월 23일 종가 7,300원의 2.35배에 달한다. 즉, 개인 대주주가 자신의 지분을 처분하든, 지주회사가 자회사의 지분을 처분하든 간에 해당 지분은 경영권 지분이며, 법인세를 고려하더라도 경영권 프리미엄이 훨씬 크다.
경영권 프리미엄이 이토록 큰 것은 우리나라가 미국을 제외한 선진국 중 거의 유일하게 의무공개매수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도 이해관계 충돌 등의 문제로 사실상 100% 주식을 매수하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나라는 이 제도가 없는 거의 유일한 선진국이다. 의무공개매수제도 도입은 대한민국 자본시장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윤석열 정부의 공약에도 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다.
여하튼 경영권 지분과 시장에서 사고파는 주식의 가치는 40% 이상 차이가 난다[한국의 경영권 프리미엄은 평균 40%(정준혁), 48~68%(이창민, 최한수), 48~56%(임자영), 39~74%(김석봉) 수준으로 조사된다]. 즉, 엄연히 이중 가격이 존재한다. LG의 LG화학 지분 가치는 시장가에 지분율을 곱해 단순 계산한 약 12.4조 원보다 훨씬 클 것이다.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지분 가치 역시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상속세 및 증여세법도 엄연히 경영권 프리미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서 경영권 지분이 상속, 증여될 때 20%의 세금을 더 걷는다.
이처럼 어떠한 논리로도 설명이 안 되지만, 아직도 많은 투자자가 지주회사가 가진 자회사의 가치를 할인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별다른 설명 없이 상장 자회사의 지분 가치를 40%, 50% 할인해 지주회사의 목표가나 적정가를 정하는 증권사 보고서도 흔하다.
엄청난 이중 가격이 존재하는 모순 마주하기
본질을 보면 할인해야 할 것은 상장 자회사의 지분 가치가 아니다. 지주회사의 가치는 더욱 아니다. 실제 LG의 가치는 약 12.8조 원이 아니라 훨씬 크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대한민국 4대 재벌이며 명목 자산총액이 167조 원에 이르는 기업 집단을 거느린 지주회사의 위상에 맞는다.
굳이 할인해야 한다면 대상은 지주회사의 가치 중 시장에서 거래되는 비지배주주의 지분 가치다. ‘지주회사의 실제 가치는 예컨대 100만큼 큰데, 시장에서 거래되는 비지배주주의 지분 가치는 10이나 20만을 반영하고 있다’로 설명해야 한다. 또는 ‘이중 가격이 존재하는데 그 격차가 어마어마하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너무나도 엄청난 괴리와 모순을 애써 외면하려 하니 본질을 외면한 수많은 논리가 나오는 것뿐이다.
강남제비스코성
피뢰침 차트
‘가격’에 ‘가치’를 끼워 맞추려는 논리는 부동산 자산주에서도 흔히 등장한다. 2021년 12월 28일, 강남제비스코는 보유 중인 군포 토지를 2천억 원에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강남제비스코는 공장을 평택으로 이전했고 군포 토지 인근은 개발이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언젠가는 군포 토지가 매각될 것으로 기대하고 끈질기게 투자한 사람도 많았다. 공시 시점을 기준으로 강남제비스코는 자본총계가 6,973억 원에 달하지만 부채는 2,294억 원에 불과하고 이 중 차입금은 548억 원이었다. 그런데도 28일 당일 기준 시가총액은 토지 매각 가격보다도 훨씬 낮은 1,573억 원이었으므로 군포 토지 매각과 상관없이 크게 저평가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토지까지 매각되니 기업의 가치가 얼마나 더 부각되었겠는가.
그러나 강남제비스코의 주가는 공시 다음 날인 29일 아침 잠시 상한가를 기록하더니 결국 4.8%라는 비교적 크지 않은 상승으로 장을 마감했다. 심지어 이 글을 쓰는 2022년 6월 초 현재의 시가총액은 1,589억 원이어서 토지 매각 공시 전의 시점으로 거의 돌아오고야 말았다. 부동산을 매각해서 처분이익이 많이 발생하더라도 주주에게 환원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깨닫는 데 채 하루가 걸리지 않은 셈이다.
강남제비스코 주가 차트(2021/09~2022/06)
나는 기업이 시가총액과 비교해 상당한 수준, 혹은 시가총액 이상의 부동산을 처분하더라도 금방 주가가 원상회복하는 현상, 주가 차트에서 ‘피뢰침’을 그리는 현상을 우리 자본시장에 존재하는 ‘강남제비스코성(性)’으로 부르기로 했다.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란 부동산 자산주
우리 자본시장에서 강남제비스코성은 수시로 나타난다. 경방은 2019년 12월 16일 용인 토지를 1,500억 원에 매각한다는 공시를 냈고 다음 날 잠시 상한가를 기록했지만 종가는 3.2%라는 평범한 상승에 그치고 말았다. 일신방직도 2020년 7월 23일 광주 토지를 3,190억 원에 매각한다는 공시를 냈고 24일 상한가를 기록했지만 종가는 2.3% 상승에 그쳤다. 같은 날 일신방직과 맞닿은 광주 토지를 약 3,660억 원에 매각한다고 공시한 전방은 24일 상한가를 기록한 후 같은 날 무려 11.0% ‘하락’으로 마감하기까지 했다. 물론 전방은 알 수 없는 이유로 2~3일 전부터 미리 주가가 오른 탓도 있을 수 있다. 한일화학 또한 2021년 1월 15일 시흥의 토지를 670억 원에 매각한다는 공시를 냈는데, 18일 상한가를 기록하더니 연이어 주가가 하락해 한 달도 안 되어 원래 주가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강남제비스코성은 극단적인 예일 뿐이다. 부동산을 가진 기업이 그 부동산을 매각한다고 해서 굳이 주가가 올라야 한다는 논리도 허술하다. 기업은 매각 전에는 부동산으로, 매각 후에는 현금으로 같은 가치의 자산을 지닌다. 그러니 매각 전에도 부동산의 가치를 정당하게 더해 가치평가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런 논리로 시장을 분석하면 현재 부동산 자산주가 매우 많이 확인된다.
대표적인 예로 BYC는 확인된 것으로만 전국에 빌딩 40여 채를 보유하고, 개발 가치가 높은 본사 부지도 약 2만 3,000m2(7,000평) 보유하고 있다. 롯데칠성의 서초동 부지는 면적이 4만 2,312m2에 달한다. 태광산업은 장충동의 옛 동북고등학교 부지와 부산 구서동의 옛 공장 부지 4만 8,914m2 등을 보유하고 있고, 계열사 대한화섬은 부산 반여동의 토지 약 20만 m2(6만 평)로 유명하다. HDC는 명목 PBR이 0.1배지만 강남구 삼성동과 대치동에 직접 또는 계열사를 통해 보유한 부동산만 해도 시가총액을 훌쩍 넘긴다. 일신방직은 앞서 언급한 광주 토지 외에도 여의도, 한남동, 청담동 등에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신도리코는 성수동 토지만도 약 1만 8,000m2에 달하고, 세이브존I&C의 토지 가치도 1조 원이 넘는다. 사조산업은 캐슬렉스 골프장을 보유 중이고, 사조 그룹 계열사들도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 크라운해태홀딩스는 본사 부지 외에 양주에 아트밸리 330만 m2(100만 평)를 보유 중이며, 베뉴지도 골프장, 백화점, 호텔, 용인의 물류센터부지 등을 보유 중이다. 신세계가 가진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명동 본사의 토지 가치는 얼마일까? 하림지주의 양재동 부지도 마찬가지다. 골프장의 가치가 치솟고 있는데 KMH와 골프장뉴딘홀딩스처럼 골프장을 여럿 가진 기업들은 어찌 평가하는 게 옳을까?
이렇게 일일이 소개하다가는 책을 한 권 채워도 모자란다. 보유 부동산의 가치가 시가총액의 수 배에 달하는 자산주가 널려 있고 잘 알려진 종목도 많다. 검색창에 ‘부동산, 자산주, 토지, 저PBR’ 등을 키워드로 조금만 검색해도 많은 부동산 자산주를 찾아낼 수 있다. 또한 자산주로 불리는 기업의 부동산 가치가 너무나 크기에 ‘에이, 많지도 않네’라는 평가를 받는, 보유 부동산의 가치가 시가총액보다 다소 높거나 2~3배 정도인 기업은 흔한 편이다.
흙수저 전문직과 건물주
보유 부동산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현상, 보유 부동산을 매각해 큰 이익이 생기더라도 가격이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는 강남제비스코성이 계속되니, 역시 이에 관한 논리도 등장한다. 자산주엔 ‘성장’이 없어서 낮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은 과정이고 수단일 뿐이다. 자산은 성장의 결과물이다. 성장은 돈을 모으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장을 통해 돈을 모으는 데 오랜 기간이 걸리기에 불확실성이 존재하지만, 자산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어서 불확실성이 없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성장주는 흙수저 출신 전문직 종사자이고, 자산주는 건물주다. 현실 세계에서는 많은 이가 돈을 벌어서 건물주가 되기를 목표로 한다. 건물주는 코리안 드림의 상징이며 부러움의 대상이다.
상황 논리 외에 욕심도 작용한다. 빨리 돈을 벌고 싶은 욕심에 성장주가 헤쳐나가야 할 난관을 간과한다. 성장주가 성장을 이어가 현재의 자산주와 같은 자산을 가지기 위해서는 많은 가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이른바 성장 스토리가 들어맞아야 하고 스토리의 단계마다 성공해야만 하는데도 온갖 노력을 기울여 확신하기 위해 노력한다. 도리어 비판하는 사람에게 더 공부할 것을 주문하는 우스꽝스러운 일도 벌어진다. 욕심이 IQ를 크게 낮추어, 현실 세계에서는 멀쩡한 사람도 투자할 때에는 바보가 된다.
거버넌스 문제 외면하기
모든 스토리가 이루어져 돈을 모아 훌륭한 자산을 가지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그 자산이 주주에게 환원될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현재의 성장주도 미래에는 상속과 증여를 고민해야 한다. 또 지배주주와 비지배주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아 생기는 대리인 문제, 소수주주를 보호하지 않는 법과 제도, 지배주주 가족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비지배주주의 것을 빼앗아야만 하는 세금 문제는 성장주라고 하여 비껴가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성장주 투자는 주주환원이 제대로 되지 않는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거버넌스 문제를 나중의 일로 미루고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강남제비스코성은 돈을 벌어도 주주환원으로 이어지지 않는 문제를 하루 혹은 한 달 내의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성장주 투자는 강남제비스코성에서 일어나는 상승 국면이 수년간, 진실을 마주하기 전까지 천천히 계속되는 것이다.
부동산 자산주를 이야기하면서 현금 자산주를 빠뜨렸는데, 현금이 시총보다 많은 현금 자산주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업이 부동산과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 부동산의 가치와 현금의 가치만큼 현실을 반영해 정확히 가치평가를 해주어야 한다. 기업이 부동산과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 부동산과 현금이 가치가 없다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