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텀업 투자자다. 톱다운 방식의 투자가 나쁘다고 판단해서가 아니라 바텀업 방식이 잘 맞아서 바텀업으로 투자한다.
글로벌 경제를 전망하고 투자 대상 국가의 거시경제 및 사회·정치적 이슈를 분석하고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업종에서 기업을 고르는 톱다운 방식은 분명히 매력적이다. 시장에서 이슈가 될 때 빨리 매수하면 큰 수익을 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방식은 나에게 잘 맞지 않는다. 나는 예측과 전망 능력이 전혀 없는 데다 둔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형 헤지펀드 바우포스트그룹 회장인 세스 클라만은 저서 《Margin of Safety(안전마진)》에서 자신이 바텀업 투자자임을 고백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톱다운은 미래, 거시경제, 산업 등 경제의 다양한 섹터에 대한 영향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하는데 거의 불가능하고 정확한 예측을 했다면 재빠르게 투자를 집행해야 한다. 그러나 바텀업은 예측에서 자유롭다. 싸게 사서 기다리면 된다. 바겐세일이 매수 구간에 들어올 때까지 경제 전체에 대한 관점이나 시장의 현황에 좌우되지 않고 기다려서 매수할 수 있는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미국 보스턴 사무실에 앉아서 전 세계의 경제를 꿰뚫어 볼 거라고 생각되지만 그 역시 톱다운 방식이 쉽지 않은 듯하다. 그러니 대한민국 서울의 개인 투자자인 내가 톱다운 방식으로 성공하기는 더 어려우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바텀업이 적성에 잘 맞는 면도 있고 18년간의 투자 성과에 나름 만족하기 때문이다.
에프앤가이드와 한국거래소 자료로 지표 작업
바텀업 방식은 상장되어 있는 2,000개가 넘는 기업 중에서 투자 대상을 고르는 것이다. 그러려면 투자 대상 기업들의 모집단부터 확보해야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금융 정보를 제공하는 기업 에프앤가이드가 이 자료를 무료로 배포한다. 에프앤가이드는 매년 기업들의 정기보고서(1분기, 반기, 3분기, 사업) 제출일 다음 날만 되면 모든 상장기업의 재무 정보를 엑셀로 정리해서 자사 홈페이지(fnguide.com)의 Notice 코너에 올려놓는다.
11년째 이 자료를 이용하는 내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재무 정보가 소계정까지 다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대계정과목 기준으로 작성되어 있다. 아무래도 소계정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면 분석하고 투자할 만한 기업을 고르기가 더 수월하다. 그러나 밤새 수작업으로 2,000개가 넘는 기업의 재무 정보를 입력했을 텐데 이를 무료로 달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것이다.
이 엑셀 자료에 시가 자료만 붙이면 실적과 주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시가 자료는 한국거래소(krx.co.kr) 시장정보에서 상장기업 모두를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주요 재무 정보와 시가 자료를 하나의 엑셀 시트에 합치면 기본적인 지표, 즉 주가수익배수(PER), 주가순자산배수(PBR), 자기자본이익률(ROE), 주가매출액배수(PSR), 주가현금흐름비율(PCR) 등을 계산할 수 있다. 시가는 매일 변동하므로 주가가 많이 떨어진 날 엑셀 시트에서 시가 자료만 업데이트하면 살 만한 종목들이 눈에 잘 들어온다.
단, 이런 재무 비율이 기업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예를 들어 PER 10 미만, PBR 1 미만이라고 반드시 저평가로 단정할 수 없다. 실적과 재무 구조가 좋은데 시장에서 찬밥 신세가 되어 정말 저평가인지, 성장성이 없기 때문에 기업 가치 상승의 동력을 잃어버린 것인지 이 정보만으로는 알 수 없다. 재무 비율은 2,000개가 넘는 기업들의 대계정과목 정보만으로 추려내는 단순한 기준일 뿐이다. 선별 후에는 반드시 추가적인 양적 분석과 질적 분석을 거쳐야 한다.
양적 분석 첫 번째: PBR 1 미만 등 5가지 기준으로 체크
나는 PBR 1 미만, PCR 0 이상, 순유동자산(유동자산 - 유동부채) 양수, 발표 영업이익률 8% 초과, 2년 연속 영업이익 달성, 이 5가지를 모두 충족한 기업부터 선별한다. 대계정과목 수치만 제공받으니 종목 추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별 기준도 이처럼 러프하게 잡는다. 일단 PBR이 작다는 것은 저평가 종목임을 암시한다. PCR이 0보다 크다는 것은 영업활동을 통해 현금흐름을 창출한다는 뜻이다. 순유동자산이 양수라는 것은 1년 내에 현금화될 수 있는 자산이 1년 내에 갚아야 하는 부채보다 많음을 의미한다. 발표 영업이익률 8% 초과 항목은 영업흑자를 낸 상장기업들의 영업이익률 평균값이 7.5%이므로 평균을 초과한 기업만 투자 대상으로 삼겠다는 취지다. 마지막으로 2년 연속 영업이익 달성 항목으로는 최소 2년 동안 이익을 낸 기업만 투자 대상으로 삼는다. 2년 조건은 에프앤가이드에서 전기와 당기 수치 2년 치를 제공한다는 제약에서 나왔다.
사실 이 5가지 기준으로 기업을 완벽하게 뽑아내기란 불가능하다. 성장이 확실한 기업은 주가가 미리 움직이는 경향이 있어서 PBR이 1 넘는 곳이 많다. 또한 제조 시설이 필요 없는 서비스업은 제조업보다 자산 규모가 작기 때문에 역시 PBR 1 미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유동자산이 유동부채보다 크다고 해도 유동자산에 잘 안 팔리는 재고자산이나 회수가 잘 안 되는 매출채권, 대여금 등 부실자산이 많이 쌓였다면 유동자산 큰 것이 좋다고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5가지 지표 선별법에 다른 방법들을 추가해 종목을 뽑아낸다.
양적 분석 두 번째: 실적 성장하고도 주가 하락한 종목 선별
바텀업 방식으로 성장주를 고른다는 접근은 사실 이론상으로 맞지 않는다. 성장주는 톱다운 방식으로 골라야 한다. 앞으로 반도체, 바이오가 경제를 이끌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라면 그 업종을 대표하는 종목을 골라야 한다. 바텀업 방식은 그런 내용을 커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장주 투자라고 이름을 붙였다. 앞으로 성장할 종목을 예측하는 게 아니라 실적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떨어진 종목을 고르겠다는 취지다.
접근법은 변함없다. 역시 에프앤가이드에서 제공한 실적 수치를 이용한다. 1차적으로 전년도 대비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모두 성장하고 영업이익률이 8%를 넘은 기업을 선별한다. 기본적으로 당기와 전기 수치가 제공되므로 이렇게 뽑을 수 있다. 다음 단계에는 당기와 전기 특정 일자의 주가 자료를 한국거래소에서 다운로드해 주가 등락률을 계산한다. 예를 들어 2020년 3월 31일에 2019년 실적 집계가 완료되니 그날의 주가와 1년 전 주가를 비교하는 것이다. 참고로 2019년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2018년 대비 모두 증가하고 영업이익률이 8%를 유지했는데도 주가가 하락한 종목은 144개나 된다. 이들 기업의 명단을 추리면 저마다 사연이 있어 보인다. 올해 역시 작년보다 좋은 실적이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데 시장이 폭락함에 따라 불가피하게 떨어진 종목이 많다. 그리고 업황 특성상 올해 힘들어 보이는 종목들도 여럿이고 작년에 주가가 과하게 올라서 낙폭이 유난히 큰 기업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목 선별 후에 반드시 양적 분석과 질적 분석을 해서 최종 투자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영업이익률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기업의 펀더멘털을 평가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 아니라 힘든 저성장 시대에 영업이익률이라도 높아야 기업도 성장이 가능하다. 켄 피셔는 자신의 저서 《역발상 주식투자》에서 영업이익률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강세장 후반에 이르면 사람들은 종목 선택에 더 신중해져서 침체기가 오더라도 성장 자금을 쉽게 조달해 이익이 안정적으로 증가할 만한 회사를 찾는다. 바로 이때 영업이익률이 높은 종목은 빛을 발휘한다.
영업이익률이 높을수록 장래에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개발에 더 많이 투자해서 첨단기술을 확보할 수 있다. 시장을 더 확대할 수 있다. 자본적 지출을 늘려 생산설비를 확충하고 개선하는 등 생산 능력을 키울 수 있다.
강세장이 식어가고 높은 지수가 부담스러워지는 시점에 사람들은 영업이익률이 높은 회사를 선호한다. 지금까지 주식시장을 두려워하다가 강세장의 온기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는 신규 투자자들도 영업이익률이 높은 종목을 선호한다.”
양적 분석 세 번째: 9년간 실적이 검증된 기업에 투자
나는 실적이 검증된 기업만 투자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목 선정 방법이다. 에프앤가이드에서 2019년, 2017년, 2015년, 2013년, 2011년 5건의 실적 파일을 다운로드해서 하나로 정리했다. 한 해 실적 파일에 2년 치 자료가 있기 때문에 격년으로 다운로드하면 9년을 채울 수 있다. 9년 치 실적만 본다는 대목에서 독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워런 버핏도 기업의 10년 치 재무제표를 봐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왜 1년 뺀 9년 치일까?
우리나라 상장기업들이 의무적으로 적용하는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이 2011년에 정식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 LG그룹, 풀무원 등 조기 도입한 기업도 일부 있고, 2011년 재무제표를 만들면서 2010년 재무제표까지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으로 작성한 기업도 여럿 있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이 많기 때문에 2011년부터 보는 게 좋다. 단, 이렇게 하면 한계점이 있다. 예를 들어 2011년 이후 상장한 기업들은 9년 치 수치를 다 볼 수 없다. 에프앤가이드는 원칙적으로 상장한 기업들의 재무 정보만 작성해서 배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1년 이후 합병, 분할 등으로 기업이 합쳐지거나 쪼개진 경우에도 9년 치 자료를 완벽하게 분석하기 어렵다. 그러나 2011년 이전에 상장해서 9년째 상장 유지하는 기업이 훨씬 많기 때문에 이 자료를 만들면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나는 수많은 재무 정보 중 매출액, 영업이익, 순이익, 자본만 뽑아서 정리했다. 주의할 점은 연결재무제표 작성 기업은 당기순이익 대신 지배기업 소유주에게 귀속되는 당기순이익, 자본 대신 지배기업 소유주지분 숫자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연결재무제표는 종속기업(자회사)을 포함해서 만드는 재무제표이고 기업의 기본 재무제표이기 때문에 원칙상 이 숫자들이 주주 몫이 된다.
이 자료만 받으면 9년 치 영업이익률과 ROE를 계산해서 9년간 매출액 증가, 영업이익 증가, 매년 영업이익 달성, 매년 영업이익률 증가, 매년 ROE 증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또 매년 영업이익률 8%를 초과한 기업만 추릴 수도 있다. 순이익을 달성한 기업들의 평균 ROE가 11%를 약간 밑돌기 때문에 9년 동안 매년 ROE 11%를 초과한 기업을 추리는 작업도 가능하다. 참고로 2011년부터 2019년까지 9년 연속으로 영업이익을 달성한 기업은 609개이고, 매년 매출이 증가한 기업은 CJ대한통운을 비롯해 92개나 된다. 매년 영업이익이 증가한 기업은 LG생활건강을 포함해서 7개이고, 매년 매출액과 영업이익 모두 증가한 기업은 NICE평가정보를 포함해서 6개뿐이다. 매년 영업이익률 8%를 초과한 기업은 삼성전자, 네이버 포함 100개이고, 매년 ROE가 11% 초과하는 기업은 한온시스템, 고영 포함 27개나 된다.
투자하다 보면 운 좋게 단번에 많이 올라서 빨리 매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예상보다 훨씬 오래 보유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아주 오랜 기간 보유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망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는 기업에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기업이 예년 실적을 뛰어넘는 성장을 보여야 기업 가치인 주가도 상승하므로 실적이 검증된 기업에 투자해야 승률도 올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