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가치투자는 한국 주식시장에서 잘 통하지 않았다. 최대 주주와 일반 주주의 이해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업을 경영하는 이사들은 사실상 최대 주주에 의해 선임돼 최대 주주의 이익에 충실한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러 변화가 어우러지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공정경제 3법’이 작동하고 ‘스튜어드십 코드’가 실행되고 있다. 그 결과 일반 주주들이 감사 선임에 성공하는 등의 사례가 나오고 있다. 한국 주식시장이 현재 PBR 1배인 ‘밸류 트랩’에서 탈출하는 거대한 변화가 시작됐다.
“한국 주식 절대 투자하지 마세요.” 한 유명 유튜브 채널에서 내 인터뷰 영상에 달아준 제목이다. 유튜브식 어그로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내 진심이 담겨 있다. 조금 더 부연하면 정통 가치투자, 즉 철저한 펀더멘털 분석에 기반해 안전마진이 확보된 가격에 장기 투자하면 언젠가는 주가가 본질 가치에 수렴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접근은 한국 주식시장에서는 최소한 지금까지는 잘 통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수십 년 동안 가치주 상태로 머물러 있는 수많은 국내 상장기업을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실증적으로 내 생각에 동의하는 투자자가 많으리라고 본다.
투자업계, 학계, 법조계 등에서 많은 오피니언 리더가 공통되게 지적하듯이,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라고 불리는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 원인은 우리나라의 상법상 주식회사에서 발행하는 주식에 부여된 법적 권리가 전 세계 대부분의 주식시장, 특히 미국 시장과 크게 달라서, 이사를 선임할 권한이 없는 일반 주주들의 재산권이 사실상 전혀 보호되지 않는 데 있다.
현대적 주식회사의 기본적인 개념은 회사를 주식 비율만큼 나누어서 소유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회사의 주주들은 회사의 모든 잔여 이익과 위험을 주식 보유 비율만큼 비례적으로 나누어 부담한다. 그러므로 주주 A가 보유한 1주의 권리와 가치는 주주 B가 보유한 1주의 권리와 가치와 동일한 것이 원칙이다(주주 평등 원칙). 다만 현실적으로 수많은 주주가 직접 경영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주주들은 1주당 1표씩 부여된 의결권을 기반으로 자신을 대신해 회사를 경영할 이사를 임명하며, 이사들은 자신을 임명해준 주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회사를 경영한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는 위 문단의 마지막 문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이사는 모든 주주를 위해 일할 대리인이지만 실무적으로 주주총회에서 참석 주주 과반의 찬성으로 임명된다. 그런데 최대 주주를 제외하고는 주식 소유가 수많은 일반 주주에게 분산되어 있고, 일반 주주의 주주총회 참석률이 높지 않은 데다가 이사를 추천하지도 않으므로, 실질적으로 상장기업 대부분은 이사 전원을 작게는 15~20% 지분만 보유한 최대 주주가 임명하게 된다.
우리나라 상법 제 382조의 3(이사의 충실의무)은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회사’에 주주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어, 이사들은 회사 법인 차원에 직접적인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대주주에게만 이익이 되고 일반 주주들에게는 손해가 되는 의사결정을 해도 법적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다. 즉, 이사들이 일반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의사결정을 해도 회사 자체에 금전적 손실이 없다면, 일반 주주들은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소송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회사의 주식 가치를 공정 가치보다 낮게 평가해서 대주주가 높은 지분율을 가진 다른 회사와 불리한 합병 비율에 합병한다든지, 인적 분할을 할 수 있는데도 지배권 유지 목적만으로 물적 분할을 해서 상장한다든지 하는 의사결정이 대표적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금전적 손실이 발생하지 않지만, 일반 주주의 주식 가치는 크게 훼손되는 경우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대표인 이사를 선임할 권리를 가진 최대 주주의 이해관계와 일반 주주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시가를 기준으로 책정되는 상장주식 상속세가 최고 60%에 달하고, 배당에 대한 금융소득종합과세도 주민세 포함 최고 50%에 달하기 때문에, 보유 지분을 후대에 상속하고자 하는 대주주들은 오히려 자기 회사의 주가가 낮아지기를 바라고, 회사에 현금이 쌓여도 배당하지 않기를 원한다. 따라서 주가가 올라가기를 바라고 사업을 지속 가능한 수준에서 남은 이익금을 최대한 배당받기를 원하는 일반 주주들과 대주주 간에 심각한 이해관계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상장기업의 이사들은 자신을 임명한 대주주만을 위한 의사결정을 해왔고, 또 그렇게 해도 아무런 리스크가 없었다.
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을 때에는 이러한 대주주-일반 주주 간 이해 충돌이 상대적으로 문제가 덜 된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경제의 고속 성장 시기에는 버는 돈을 모두 높은 수익이 기대되는 사업 기회에 재투자했고 이것이 모든 주주를 위해 이익이었기 때문에 주주 간 이해 충돌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었다. 그렇지만 IMF 구제금융을 초래한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한국 경제의 고속 성장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많은 기업이 저성장 성숙기에 이르러 시간이 갈수록 회사가 창출한 수익을 어떻게 활용하고 주주 간에 분배할지가 한국 상장주식의 가치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요컨대 현재의 상법, 세법 구조에서는 한국 상장기업 대부분이 특별히 재투자할 곳이 없더라도 가급적 이익을 유보하고 주가 상승을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이지 않게 된다. 이는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자본 보유로 이어져,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주가순자산배수(PBR)와 자기자본이익률(ROE)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그림 1).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내재가치 대비 저평가된 기업을 사도 주가는 내재가치에 영원히 수렴하지 않는다. 대주주의 지분율이 일정 수준, 예컨대 30% 이상으로 높은 상장기업들에서 일반 주주들의 영향력이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한국 상장주식에 투자하면 돈을 내고 주식이라는 자산을 샀음에도 그 운명을 오로지 대주주의 자비와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림 1] 전 세계 주요 지수의 평균 PBR과 ROE 비교
내가 이야기한 많은 외국인 기관투자자는 이러한 한국 주식시장의 상황을 밸류 트랩(value trap)으로 표현한다. 그들이 투자하는 해외 주식시장에 비해 한국 주식시장 기업의 퀄리티 대비 주가가 너무 싸서 투자했지만, 주가가 싼 상태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경험을 반복하고 나서는 한국 시장에 대한 가치투자를 사실상 포기했다고 한다. 한국 주식시장이 베트남 주식시장보다 후진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밸류 트랩 탈출의 시작: 주식시장 환경 변화와 주주행동주의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경험으로 깨달은 일부 국내 가치투자자는 자산가치 대비 크게 저평가된 소위 딥 밸류 주식을 찾는 대신 성장가치주, 즉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어 있고 보유 자산이 많지 않지만 산업이 성장하고 재투자 기회가 충분히 존재하는 회사에 투자하는 것으로 스타일을 바꾸어 살아남았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이러한 회사에서는 재투자하는 것이 모든 주주에게 나쁘지 않기 때문에 주주 간 이해 관계 충돌이 상대적으로 덜 문제가 된다. 또는 상속하지 않고 매각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이나, 이미 상속을 완료했고 상속인의 나이가 적은 경우 등 대주주와 일반 주주 간 이해관계 충돌이 구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기업에 투자하는 방법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기업이 많지 않고, 주식이 크게 저평가되는 경우도 흔치 않으며, 이러한 기회를 찾는 투자자 간 경쟁도 치열해, 이러한 방식으로 고수익을 내며 한국 주식시장에서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의 규모는 크지 않다. 또한 이러한 경우에 해당되는 종목을 발굴하고 투자하는 것은 고도의 리서치와 분석, 판단 능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시중의 서적 등을 통해 독학하는 정도로는 쉽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평소에 주변 개인들에게는 차라리 한국 주식에 투자하지 말라고 말한다.
다만 장기적 관점에서는 한국 주식시장의 저평가를 일으키는 여러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큰 변화의 조짐들이 조금씩 보인다고 생각한다. 일반 주주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려는 제반 환경이 조금씩 갖추어지고 있다.
먼저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투자하는 국민이 2019년 말 610만 명에서 2021년 말 1,380만 명, 가장 최근인 2022년 3월에는 1,410만 명까지 크게 증가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총 유권자 숫자의 30%를 넘긴 수치다. 과거에는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별로 없었다면, 지금은 이들의 표심이 선거 결과를 좌우할 수도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거기에 유튜브를 중심으로 한 뉴미디어 혁명으로 인해 대중의 주식 투자 소양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두 가지 변화가 복합 작용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주요 대선 후보들이 모두 유튜브 채널 삼프로TV에 출연해서 자본시장, 부동산, 경제 정책에 대한 심도 깊은 인터뷰를 하기까지 했다(그림 2).
[그림 2] 개인 투자자 수 통계와 삼프로TV 대선 후보 인터뷰 섬네일
뉴미디어에 등장한 대선 후보들
과거에는 이익집단 활동과 기업 광고비에 의존도가 높은 신문, 방송 등 레거시 미디어가 여론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나, 뉴미디어 시대에는 이러한 활동의 효과가 크게 감소한다. 거기다 우리나라 국민의 해외 주식 투자가 최근 수년간 크게 활성화되면서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와 의무공개매수제도 등 주식시장 제도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가 크게 상승했다.
이러한 환경 변화에 따라 실제로 제도 개선도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2020년 12월 통과된 ‘공정경제 3법’이 사례 중 하나다. 이 법을 통해 주주제안을 위한 주식 보유 요건이 명확해졌고, 감사위원이 될 이사의 분리 선임 제도가 도입되는 등 일반 주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일부 이루어졌다(표 1). 또한 이번 대선 과정에서 상법상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인수·합병 시 의무공개매수제도 등에 대해서도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졌다(표 2). 국회에서 여러 가지 논의가 지속되고 있어, 현재와 같은 환경이 유지된다면 앞으로도 주주의 비례적 이익이 보호되는 방향으로의 제도 개선이 점진적,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