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버넌스’는 ‘조직이 목표를 추구할 때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 사항을 수행하기 위한 체계’로 정의됩니다. 기업의 직원, 경영진, 이사회, 주주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관련된 개념이지요. 우리가 기업에 투자할 때 주요 재무 수치에 매몰되거나 압도되는 일이 많지만 사실은 거버넌스가 가치평가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합니다. 한국 행동주의 투자자의 상징적인 인물로서 2023년 주주제안을 통해 남양유업 감사로 선임되어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심혜섭 변호사가 이 칼럼에서 거버넌스와 투자의 문제를 풀어나갑니다. ― 버핏클럽


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각자도생은 일종의 신토불이 사자성어로, 임진왜란 시절 비변사에서 일본이 장악 중인 영남 지역 백성에게 다가올 위험을 알리자는 논의 중 사용된 게 첫 기록이다. 이후 각종 위기에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질 때마다 반복해서 사용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고 한다.

언어란 생명처럼 살아 진화하는 것이다. 새로운 낱말과 관용어구는 늘 만들어지지만 대부분 소멸한다. 초등학교 때 사용하던 유행어 중 지금도 쓰이는 유행어는 거의 없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간혹 아재 인증용으로 쓰일 뿐이다. 각자도생이라는 사자성어도 탄생 자체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사자성어가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상황 자체다. 특히 각자도생은 비정한 말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국가와 사회가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선진국, 복지국가, 법치주의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조선 최고의 유행어 ‘각자도생’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조직과 시기도 의미심장하다. 비변사는 보통의 국가기관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최고 의사결정기구였고, 이후 흥선대원군이 폐지할 때까지 국가 핵심 권력기관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실록》은 최고권력자들의 언어를 기록한 것으로, 최고권력자들의 머릿속에는 당시의 상황을 각자도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는 소리다.

특히 각자도생 상황 이전에는 일본의 대규모 침략과 거듭된 왕의 도주라는 충격적 사건이 있었다. 전쟁에서의 패배야 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왕이 승리하고 싶다고 승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도주는 100% 왕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도주도 보통의 도주가 아니다. 강화도나 남한산성 같은 요새로 이동해서 전쟁을 지휘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너무 순수하고 다이렉트하게 적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지금 들어도 화가 나는 일이지만 조선 시대 사람들의 심정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경복궁 화재는 아마도 일본군이 아니라 성난 민중에 의한 것으로 추측한다.

이리 도주하던 선조는 아직 일본군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요동으로까지 도주하겠다고 주장했었다. 신하들은 “지금 비록 왜적들이 가까이 닥쳐왔지만 하삼도가 모두 완전하고 강원·함경 등도 역시 병화를 입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라는 말까지 한다. 그나마 왕의 면전이니까 저렇게 말했지, 뒤에서는 XX 소리를 했을 게 틀림없다. 과연 국가가 나를 보호할 수 있을지 불안감이 팽배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도생은 뜬금없는 말이 아니다. 나는 임진왜란 당시 최고권력자들 사이에 혼돈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어떤 적당한 단어가 필요했고, 전부터 이미 각자도생이라는 사자성어가 창조되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었으며, 우연히 비변사에서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 말이 나와 정식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을 뿐일 것으로 추측한다.

올해 주식시장 투쟁의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