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크셔 해서웨이의 2인자 찰리 멍거는 자신이 워런 버핏의 ‘각주’ 같은 존재라고 너스레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실은 버핏이 멍거에게 배운 바가 컸다. 멍거의 도움으로 버핏은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워런 버핏의 맏아들 하워드 버핏은 “아버지가 두 번째로 똑똑한 사람이고, 찰리 멍거가 첫 번째”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젠가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에서 버핏은 “말은 찰리가 하고 나는 입만 벙긋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버핏의 이 농담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멍거는 버크셔의 2인자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버핏이 가치투자 방법론을 가다듬도록 도운 인물이다.

버핏은 “그의 ‘멍거 철학(Mungerisms)’은 내게 크나큰 즐거움의 원천이 되어주었으며 그는 내가 나만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찰리 멍거 자네가 옳아!》의 추천사에서 이같이 말하고 “그의 귀중한 가르침이 있었기에 버크셔 해서웨이는 예정보다 더 가치 있고 세간의 존경을 받는 회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버핏이 ‘담배꽁초 주식’에서 벗어나게 돕다

버핏은 ‘가치투자의 아버지’ 벤저민 그레이엄(1894~1976)에게서 투자를 배웠고, 멍거는 버핏이 그레이엄을 뛰어넘도록 도왔다. 멍거는 버핏이 그레이엄에 대해 품은 존경과 애정을 공유하지 않았다.

멍거는 그레이엄의 ‘담배꽁초 주식’ 투자 지침에 동의하지 않았다. 담배꽁초 주식은 장기 전망은 엉망일지라도 매우 낮은 가격에 사들였기 때문에 적정한 수익을 내는 종목을 가리킨다. 이 명칭은 매입 당시 몇 모금이라도 더 빼낼 수 있는 가치가 남아 있다는 비유에서 지어졌다.

그는 “담배꽁초 주식을 산다는 것은 위험한 유혹이고 환상인 데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정도의 돈으로는 절대 될 수 없는 아이디어”라고 주장했다. 특히 “수천억은 고사하고 수십억의 돈도 그런 식의 투자 방식으로는 운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멍거는 그레이엄에게는 맹점이 있다면서 그것은 “일부 기업은 높은 프리미엄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멍거가 보기에 그레이엄이 종목을 평가하는 방법은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과 공황을 직접 겪으면서 생각해낸 것이었다. 그레이엄은 평생 시장 붕괴의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고, 그의 투자 방법은 최악의 사태를 피하는 데 집중돼 있었다고 멍거는 분석했다.

멍거는 1965년에 변호사 업무를 그만두고 버핏의 투자 사업에 본격적으로 조언하기 시작했다. 이후 버핏은 점차 그레이엄이 사던 주식과 완전히 다른 종목을 매수했다. 이에 대해 멍거는 “내가 없었더라도 버핏은 좀 더 모양새가 좋은 사업들을 좋아하고, 시장 가격보다 높은 가치를 가진 담배꽁초 주식에는 점차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내가 한 일은 버핏이 이미 가고 있는 방향으로 좀 더 빨리 밀어준 정도”라며 겸손해했다.

버핏이 그레이엄에게서 배운 핵심은 ‘기질’

멍거가 냉정하게 평가했지만 그레이엄은 당시 투자 업계에서는 유일무이한 지식인이었다. 그레이엄은 32세이던 1926년에 투자회사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론을 정리했고, 1928~56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투자론을 강의했다.

버핏은 1950~51년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며 1949년에 나온 그레이엄의 책 《현명한 투자자》를 읽었다. 버핏은 그레이엄이 타계한 1976년에 그를 기리는 글을 썼고, 그 글은 이 책의 개정판에 서문으로 수록되었다. 버핏은 이 책을 ‘투자에 대한 가장 뛰어난 책’으로 꼽았다.

그레이엄은 가치투자의 개념을 정립하고, 주식이 그에 해당하는 자산의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시기가 있는데 이는 전문 투자자에게 큰 기회라고 설명했다. 그는 무관심과 대중의 편견으로 가격과 가치의 차이가 벌어진다며, 이 차이에서 성과를 보려면 용기, 배짱, 인내심, 지갑의 두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버핏이 그레이엄에게 배운 핵심은 적절한 기질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를 사는 원리, 그레이엄의 안전마진 원리에 심어진 보수주의, 그리고 일상적인 증시 소용돌이로부터의 초연함 등이었다. 버핏은 그에 대해 “나에게 그는 저자나 스승 이상의 의미가 있다”며 “아버지를 제외한 어떤 사람도 그만큼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대학에서 수학, 군대에서는 기상학 공부

멍거는 미시간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입대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게 됐다. 군대에서 기상 예측을 담당했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텍)에서 기상 전문가 교육을 받았다. 종전된 뒤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다. 로스쿨을 졸업한 뒤에는 파트너들과 함께 로펌을 만들어 변호사로 활동했다.

멍거는 변호사로 활동하는 동시에 파트너로서 몇 명과 함께 투자조합을 운영했다. 그의 투자조합은 1962~75년 13년 동안 연평균 수익률 20%를 올렸다. 멍거에게 조언을 받은 이후 버핏은 투자자 조합원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가끔 ‘서해안의 철학자’라는 친구를 언급했다. 그가 바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한 멍거였다.

버크셔 초기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은 블루칩 스탬프, 시즈캔디 등 여러 캘리포니아 기업 인수였다. 이들 회사는 대부분 멍거가 발굴하거나 그와 친분이 있는 서부 연안 투자자들이 찾아낸 것이었다.

멍거와 버핏은 블루칩 스탬프 때부터 확실한 비즈니스 파트너가 됐다. 블루칩 스탬프는 로스앤젤레스 소재 회사였다. 둘은 각자 이 회사 주식을 사들이고 있었다. 버크셔는 1968년에 블루칩 스탬프에 투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