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버핏도 실수한다. 그러나 그는 실수를 직시하고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유연하다. 자신의 과거 실수를 바로잡는 의사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실수와 관련해 버핏이 내린 가장 영리한 결정은 ‘실패 위험이 높은 주식’보다 ‘주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높은 회사’를 사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 의사 결정을 실행한 결과가 오늘날의 버크셔 해서웨이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이것이다. 버크셔는 투자 1순위 주식이다.


사례 1. 기막힌 포스코 포착, 매도 시점 놓치다

“포스코 주식에 모두 5억 7,200만 달러를 투자해 2006년 말 기준 평가 금액이 11억 5,800만 달러로 불어났다.” (버크셔 해서웨이, 2006년 연차보고서, 2007. 3. 2. 홈페이지 공개)

348만 6,000주, 지분 4.0%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2007년 3월 2일 종가 기준 버크셔의 포스코 투자수익률은 135%였다. 이날 종가가 36만 4,000원이었으니, 버크셔의 포스코 주식 평균 매입 단가는 약 15만 4,700원이었다.

워런 버핏은 2007년 10월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다. “나와 버크셔 해서웨이는 약 4년 전부터 한국 주식에 투자해왔다”고 말한 다음 “이미 공개한 포스코 말고도 기아차, 현대제철, 신영증권 등에도 투자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주가가 올라 한 종목을 제외하곤 모두 처분했다고 밝힌다.

버크셔 해서웨이 2008년 주주서한에서는 “나는 가격이 떨어질 때 양질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을 좋아합니다”라며 포스코 주식 추가 매수를 설명한다. 버크셔는 2008년 포스코 지분을 전년보다 0.7%포인트 늘어난 5.2%로 확대했다.

버핏은 2010년과 2011년에도 포스코에 대한 여전한 애정을 표명한다. 2010년에는 정준양 회장을 만나 “경제위기로 주가가 하락했을 때 포스코 주식을 더 샀어야 하는데 그 시기를 놓친 것이 아쉽다”며 “포스코 주식을 더 확보하겠다”고 말한다. 2011년에는 “회사는 잘하고 있는 데 비해 주가가 저평가되어 있다”고 진단한다.

2015년 4월 버핏이 포스코 지분을 정리했다는 소문이 언론 보도를 통해 돌았다. 며칠 뒤 버핏은 포스코 주식을 여전히 상당량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후 포스코 관련해서는 거론되지 않았다.

이처럼 버핏이 2003년에 시작한 포스코 투자를 되짚어봤다. 결론은 이것이다. ‘가치주를 잘 포착했으나 너무 오래 보유했다’.

그는 포스코 매수 당시 한국 주식시장에 “PER이 3~4배에 불과한 기업이 많아, 개인 포트폴리오 대부분이 한국 업체였다”라고 설명했다. 포스코 주가는 2007년 10월 72만 원대까지 상승했다. 이 주가를 기준으로 하면 버핏과 버크셔의 수익률은 365%에 이르렀다. 버핏은 계속 보유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초대형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포스코 주가는 70만원 대를 되찾지 못했다. 점차 하락해 2015년에는 20만 원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버핏은 2003년에 포스코의 실적 호조를 예상했을 것이다. 실제로 포스코의 영업이익은 2003년 3조 585억 원에서 2004년 5조 537억 원으로 65% 급증했다. 2005년 5조 9,119억 원으로 17% 늘더니 2006년에 3조 8,923억 원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2007년에 4조 3,082억 원으로 회복했다. 주가가 72만 원대를 친 시기다. 2008년엔 영업이익 6조 5,401억 원을 기록하며 기염을 토했다. 이후 3조 원대로 감소했다가 5조 원대를 회복했으나 2012년 이후 2016년까지 3조 원 전후를 기록했다. 주가는 2019년 5월 3일 종가로 25만 2,500원이다.

버핏은 포스코를 분할 매도했을 테고, 워낙 저가에 매수했으니 높은 수익률을 올렸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진이 강도 높게 오래 이어지리라는 점을 감안하지 못한 듯하다.

사례 2. 과거 성공에 도취, ‘체크리스트’를 간과하다

버크셔는 1993년 덱스터 슈(Dexter Shoes)의 지분 100%를 4억 3,300만 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덱스터 슈의 실적은 바로 다음 해부터 틀어져서 신발 부문 매출과 이익이 내리막을 탔다. 1999년까지 매출은 18%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57% 줄었다.

마이클 배트닉(Michael Batnick)은 책 《투자 대가들의 위대한 오답 노트(Big Mistakes)》에서 버핏의 경우 이 실패 사례를 들었다. 배트닉은 “몇 년 후 덱스터 슈의 가치는 0이 되었다”고 전했다.

버핏의 실수는 무엇일까. 그는 덱스터 슈의 사업에 경제적 해자가 있는지 확실하게 두드려보지 않았다. 과거 비슷한 인수의 성공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했다. 앞서 인수한 신발회사 H. H. 브라운이 기대 이상의 실적을 올린 것이다. 또 H. H. 브라운을 경영하고 덱스터 슈 인수를 중개한 프랭크 루니를 과신했다. 덱스터 슈를 창업한 해럴드 알폰드 역시 지나치게 믿었다.

이를 1993년 주주서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설명은 당시에는 버핏의 자랑이었지만, 이제는 버핏의 수치로 남았다.

“지난해 덱스터 슈 인수의 기반이 된 것이 1991년 인수한 H. H. 브라운입니다. 작업화, 작업용 부츠, 기타 신발을 제작하는 우수 업체 H. H. 브라운을 인수한 것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기대치가 이미 높았지만, 프랭크 루니 덕분에 높아진 눈높이까지 크게 뛰어넘고 있습니다. (중략) 프랭크의 팀을 믿고 1992년 말 우리는 로웰 슈를 인수했습니다. 로웰은 여성화와 간호사용 신발 업계에서 중견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사업에 일부 조정이 필요했습니다. 이번에도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덱스터주에 기반을 두고 대중적인 가격대의 남성화와 여성화를 제조하는 덱스터 슈를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께 장담하건대 덱스터 슈는 바로잡을 것이 없습니다. 덱스터 슈는 찰리와 제가 업계에서 접한 기업 가운데서도 특히 경영 상태가 뛰어난 기업입니다.

5년 전만 해도 신발 사업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이 사업에 종사하는 7,200명의 직원을 두고 있고, 출근길에 운전을 하며 “신발만 한 사업은 없다”라고 노래합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해럴드와 피터는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일인 회사 경영을 합병 전과 다름없이 하게 될 것이고, 이를 믿어도 좋습니다. 버크셔는 4할 타자에게 방망이 휘두르는 법을 지시하지 않습니다.” (《투자 대가들의 위대한 오답 노트》에서 인용)

버핏은 당시 덱스터 슈가 사업상 직면한 과제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회사의 경제적 해자를 따져보지 않았다. 앨리스 슈뢰더는 버핏의 자서전 《스노볼》에서 “버핏은 수입한 신발에 대한 수요가 시들해지리라고 예상했고, 그렇게 예상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범위를 다소 벗어난 일이었다”고 진단했다.

버핏은 실수 인정을 주저하지 않았다. 1999년 사업을 보고한 주주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주로 국내에서 신발을 생산하는데, 국내 업체가 효과적인 경쟁을 펼치기에 환경이 극도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1999년 미국에서 판매된 신발 13억 켤레 가운데 약 93%는 극도로 원가가 낮은 해외에서 생산된 제품입니다.” 이어 2000년 주주서한에서는 “1993년 덱스터 슈를 인수하며 그만큼의 금액을 지불한 것은 분명히 실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5년 동안 버크셔 주주서한에서 덱스터 슈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버핏이 이 건을 시간과 함께 흘려보낸 것은 아니다. 그는 2014년에 “이것은 금융 재앙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사건입니다”라고 회고했다. 2007년과 2016년에도 덱스터 슈 인수의 실패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