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성 뉴욕생명 최고투자책임자(CIO) 겸 아시아 회장은 월가에서 한국인 중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로 꼽힌다. 800조 원이 넘는 자산을 운용하는 윤 CIO는 어떤 원칙에 따라 어떻게 투자할까? 그는 점진적으로 투자한다면서 “홈런을 위해 헛스윙을 하는 것을 줄이고 안정적으로 안타를 치는 데 집중한다”고 말한다. 또 “기업보다 부문이나 산업을 본다”고 들려준다. 그는 현재 시장 상황이 2년 전과 달라졌다면서 개인 투자자는 인플레이션에 대비하면서 “밸류에이션을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 세계 금융의 중심지 월스트리트. 모든 금융인이 선망하는 곳인 만큼 문이 좁다. 게다가 유리천장이 두껍고 인종의 벽도 높다. 주류 중의 주류 자리는 백인 남성이 장악하는 배타적인 길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한국인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다. 윤제성 뉴욕생명 최고투자책임자(CIO) 겸 아시아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뉴욕생명은 1845년에 설립된 미국 1위의 생명보험사다. 운용하는 자산만 6,500억 달러(830조 원)에 달한다.

월스트리트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한국인 중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성취를 평가 절하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세계적 자산운용사들도 만나기 쉽지 않다는 그를 5월 14일 뉴욕 맨해튼 허드슨 야드에서 만났다.

월스트리트에서 30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유럽과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옛날 분이었죠. 저에게 무조건 공대에 가서 엔지니어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코넬대학에 들어가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죠. 하지만 제가 졸업했을 때 갑자기 냉전이 끝나면서 불경기가 시작됐고 회복될 기미가 없었습니다. 테크(기술) 관련 기업에서의 기회는 완전히 사라져버렸죠. 기업에 취직해야 시민권을 받을 수 있는데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어를 못하니 한국에 갈 수도 없었고요.

이때 월스트리트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금융회사들은 학부 졸업생에게 비자를 주지 않았고, 저는 대학원에 진학해 통계를 전공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니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오라클에 들어가서 프로그래머가 될지, 메릴린치나 리먼 브러더스에 들어가서 월스트리트에서 일할지가 그것이었죠. 오라클은 당시 6개월에 두 배로 매출이 늘어나는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어린 제 눈에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벌금을 받는 오라클에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월스트리트가 좋아 보였습니다. 메릴린치가 코넬대학에 와서 한국식으로 말하면 취업 설명회를 할 때 갔는데 여기다 싶었습니다. 그간의 경력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포기하지 않고 담당자를 설득했습니다. 시민권 없이는 불가능한 자리였지만 한국인 특유의 오기와 깡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결국 성공했죠.”

공대 출신으로 월스트리트에서 어떤 일을 했나요?

“처음에는 채권 트레이딩 프로그래밍을 했습니다. 금융에 대해서는 잘 몰랐죠. 2년 정도 일했는데 많이 힘들었습니다. 순간순간 돈을 버는 것에만 집중하고 매우 공격적인 트레이딩 부문의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꿈이 교수일 정도로 고지식하고 공부하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거든요. 결국 자산 관리 분야로 옮겼습니다. 그곳에 가서 리서치 중심으로 장기 투자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위기 관리의 전문가로 알려진 계기는 무엇인가요?

“메릴린치에서 일하던 1994년, 모기지 마켓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급격한 금리 인상이 원인이었죠. 저는 당시 퀀트 중심으로 리서치하고 상품 하나하나의 위험도를 따져보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던 1997년, JP모간에서 제안이 왔습니다. 일본에 가서 리스크 관리를 담당하는 자리였습니다.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 가기로 했는데 일본에 도착한 지 2달 만에 아시아 외환위기가 시작됐습니다. 원달러 환율이 2달 만에 800원에서 1,900원 가까이 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때의 경험이 저를 위기 관리 전문가로 키웠습니다.”

전례 없던 시기라 위기 관리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혼란한 시기라서 좋았던 면도 있습니다. 회사 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됐기 때문입니다. 답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용적인 선택을 해나가야 했고, 이런 과정은 보람이 있었습니다. 3년간 일하면서 회사의 돈을 여러 차례 지켜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채권 선물을 매수하려 할 때, 담당자는 지난 20년 동안 부도가 난 적이 없다고 했지만 저는 리스크가 있어 보인다고 막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맞았죠.”

굉장한 성과를 내신 건데요.

“이후 빠르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28세가 되던 해 JP모간의 리스크 관련 아시아 책임자가 됐습니다. 이후 메릴린치에 다시 스카우트되면서 유럽·아시아 책임자로 일했습니다.”

아쉬운 점은 없나요.

“사실 메릴린치의 스카우트를 받았을 때, JP모간에서 새로운 사업 분야를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제가 떠난다고 하니 좋은 제안을 했던 건데 그때는 그걸 몰랐습니다. 그때는 야망은 있었지만 미래를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멘토가 있었다면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남습니다.”

자타공인 월가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인으로 꼽히지만 그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기회가 왔을 때 조언을 해주는 멘토가 있었다면 더 통찰력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며 “금융 산업 내에서 더 집중해야 할 방향과 영역에 대해 전략적인 판단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월가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에게 멘토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점을 잊은 적이 없다”며 “한국인들을 돕고, 더 나아가 한국 금융 산업의 변혁적인 촉매제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윤제성 CIO 약력

코넬대 전자공학 학사
코넬대 오퍼레이션 리서치 석사
1991~1997년 메릴린치 채권 트레이딩 및 리스크 관리
1997~2000년 JP모간 리스크 관리(도쿄)
2000~2002년 메릴린치 자산 관리(도쿄)
2002~2005년 웨스턴에셋 퀀트 리서치 및 리스크 관리(런던)
2005년 뉴욕생명
2010년 뉴욕생명자산운용 자산배분 CIO
2015년~ 뉴욕생명 CIO
2021년~ 뉴욕생명 아시아 지역 회장

한국인 중에서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자산 관리 분야에 한정한다면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성공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시장에서의 영향력과 관리하는 돈의 규모를 보면 가장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개인적인 보상보다는 금융 사회에 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기업에 머물기로 결정한 데 따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월스트리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경쟁력은 무엇인가요.

“저는 금융 관련 학위가 없는 상황으로 밑바닥에서 시작해 노력으로 올라갔습니다. 능력으로만 보면 아주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제 생각에 중상위 정도였던 것 같아요. 퀀트 프로그래밍 실력으로 보면 중간, 투자로 보면 중간 위 정도요. 대신 사람을 보는 눈이 있고, 네트워크가 좋고 영업력이 있었던 것이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일하는 동안 인수·합병(M&A)을 경험하면서 적정 실사(due diligence)를 많이 했습니다. 20년 넘게 5,000명 이상 본 것 같습니다. 사람의 장단점뿐 아니라 우리 회사와 잘 맞을지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을 갖췄다고 봅니다.”

그럼 부족한 점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결정력이 있습니다. 선택을 잘하면 큰 보상을 가져오지만 결정이 잘못되면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상황에서 올바른 결정을 했죠. 하지만 이것은 양날의 검입니다. 제 의견에 강한 확신을 가져도 그것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일할 때 제가 리스크가 있다고 판단하면 트레이더 등의 의견은 듣지 않고 강압적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런 식의 결정이 결국 조직에서의 입지를 약화시킨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