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행동주의 투자를 뉴욕 헤지펀드에서 시작했다. 한국 모 기업의 지분 4.9%를 블록딜로 사들인 후 가치 증대 플랜을 회사에 제시했다. 그러나 ‘한국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와 함께 거부됐다. 이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2020년부터 한국에서 투자해온 필자는 이후 6건의 행동주의 투자를 진행해 모두 성공했다.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은 한국에는 비정한 기업 사냥꾼으로 알려졌지만 미국에서는 위대한 투자자로 존경받는다. 한국의 칼 아이칸들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운용업계 경력을 뉴욕 맨해튼 다운타운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의 32 브로드웨이 빌딩에 소재한 헤지펀드에서 시작했다. 이 빌딩은 월스트리트에서 두 블록 아래이고 앞에는 월가를 상징하는 황소상이 있어서 항상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매일 황소상을 보며 출퇴근하면서 토종 한국인으로서 월가의 헤지펀드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한다는 자부심을 가졌지만, 그보다 더 설렌 것은 내 사무실에서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있는 빌딩(25 Broadway)이 전설적인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이 수십 년 전에 설립한 아이칸앤드컴퍼니(Icahn & Company)의 사무실이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비정한 기업 사냥꾼 이미지에 더 가깝지만 미국에서는 위대한 투자자로 존경받는 아이칸이 경력 초기 맞은편 빌딩에서 투자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행동주의 투자에 뜻을 품은 나에게 좋은 동기 부여가 되었다.

월스트리트의 명물 황소상. 필자가 뉴욕에 근무할 때 퇴근길에 촬영한 사진.

내가 시니어 애널리스트로 일하던 펀드는 극도로 저평가된 채권과 주식에 투자했다. 예를 들어 내재가치 1달러짜리 채권 또는 주식이 시장 참여자들의 잘못된 분석이나 오해 때문에 30센트처럼 극도로 싸게 거래되는 경우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나는 가치투자의 산실인 뉴욕 컬럼비아 경영대학원1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치고 펀드에 취직했다. 경영대학원 재학 시절에 뉴욕 주류의 헤지펀드 창업자와 포트폴리오 매니저가 방문해 특강하는 일이 많았다. 바우포스트 그룹의 세스 클라만(Seth Klarman), 오크트리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하워드 막스(Howard Marks), 퍼싱스퀘어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빌 애크먼(Bill Ackman) 등 세계적인 투자자도 강의실을 찾았다.

당시 강의실을 찾았던 투자자 다수는 주가가 크게 싸지 않아 보이더라도 이익이 성장하고 지속적인 잉여현금흐름을 창출하며 투하자본이익률(ROIC)이 높은 소위 컴파운더(compounder) 주식에 투자했다. 뉴욕에서도 극도로 저평가되어 안전마진2이 큰 주식에 투자하는 딥 밸류 투자는 주류가 아니었다. 다만 내가 만나고 연구했던 수많은 세계 최고의 투자자 다수는 딥 밸류 투자에 뿌리를 두고 있거나 현재도 같은 방식으로 투자한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은 딥 밸류 투자를 하는 펀드들의 장기 수익률이 안정적이고 꾸준하다는 사실이었다. 업계에서 오래 살아남은 펀드 다수가 딥 밸류 투자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매년 MBA 과정 학생 일부에게는 오마하3에서 워런 버핏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특권이 주어졌다. 나 역시 그러한 특권을 누리는 기회를 잡았다. 버핏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함께 식사하며 한 시간 이상 이야기를 듣는 것은 수십억 원 가치의 기회였다. 오마하의 한 호텔에서 만난 버핏은 두 권의 책을 들고 나왔다. 한 권은 오래된 한국 상장기업 편람이었다. 버핏은 한국 주식을 접하고 너무 싸다고 판단해서 투자했던, 익히 알려진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투자할 때 싸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결론은 경제적 해자4를 가진 싸고 좋은 주식을 사라는 것이었다. 흔히들 버핏이 이제는 싼 주식보다 좋은 주식을 찾는다고 알지만, 버핏은 여전히 싸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필자(가장 왼쪽)가 워런 버핏(가장 오른쪽)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내가 뉴욕에서 일한 펀드 역시 싸게 사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한 전략을 통해 설립 이후 현재까지 10여 년간 매년 10~20%의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해 운용자산 규모를 10억 달러 이상으로 키웠다. 부실채권 투자와 주주행동주의 투자에 특화하면서 미국 은행5 채권과 주식 투자에 전문성을 보유한 펀드였다.

내가 합류한 후 한국에 저평가 기업 행동주의 투자 기회가 많다고 판단해서 한국 기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전 세계 주식을 대상으로 스크리닝하면, 매년 순이익을 꾸준히 내는데도 시장에서 인식하는 영업가치6가 마이너스인 기업, ROE 등 수익성이 높은데도 유형 PBR7이 0.2~0.3배 미만인 기업, 자회사 가치 대비 극도로 저평가된 지주회사, 극도로 저평가된 보통주보다도 훨씬 더 싼 우선주 등이 걸러져 나오는데 대부분 한국 주식이다. 이들 중에서 특히 극도로 저평가된 한국 기업 주식 2종목에 투자했다. 이 중 하나가 내 첫 번째 실전 행동주의 투자이자 결과적으로 내가 이행한 행동주의 투자 중에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한 유일한 사례다.8

첫 번째 행동주의 투자 기업은 한국의 모 자산운용사로부터 지분 4.9%를 블록딜로 매수한 케이스였다. 블록딜로 매수할 때 판단해야 할 핵심 사항은 상대방이 파는 이유다. 주식시장에서 장내 매수를 통해 주식을 살 때에는 불특정 다수의 주주가 제각기 다양한 이유로 주식을 팔겠지만, 특정 기관투자가가 주식을 대량으로 매도할 때에는 이유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나보다 주식을 더 잘 알 확률이 높은 기존 주주가 장래 전망을 좋지 않게 봐서 파는 경우라면 투자를 다시 고려해봐야 한다. 다만 기업의 펀더멘털과는 무관한 이유로 파는 것이라면 좋은 투자 기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기가 있는 펀드의 경우 만기가 도래해서 어쩔 수 없이 팔거나, 환매가 들어와서 팔거나, 해당 주식을 좋게 봤던 기존 포트폴리오 매니저가 새로운 매니저로 교체되어서 종목을 교체하거나, 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 펀드가 지수에서 편출된 주식을 어쩔 수 없이 팔거나 하는 경우라면 좋은 투자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을 하기 위해 다양한 리서치 방법을 동원했다. 예를 들어 금융투자협회 웹사이트 등에서 해당 펀드의 환매 추이와 운용자산 규모 증감 추이를 파악하고 매니저 교체 여부와 시기를 조사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조사와 분석을 통해 우리는 기관의 매도 이유가 해당 기업의 펀더멘털과 무관하고, 펀더멘털은 여전히 우량하며, 혹여나 사업이 향후 몇 년간 좋지 않더라도 충분한 안전마진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고, 더구나 기업의 자본배분 방식을 개선하면 주주 가치가 크게 증대할 것이라고 보아 해당 주식을 매수했다.

해당 주식을 매수한 후, 우리가 판단하기에 너무나 명확한 가치 증대 플랜을 수십 페이지 분량의 상세한 프레젠테이션으로 작성해 회사의 경영진에게 제시했다. 돌아온 반응은 너무도 예상 밖이었다.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건 한국 정서와 맞지 않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입니다.”

기업의 주식·IR 담당자에게서 돌아온 것은 우리의 제안 내용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제안 방식에 대한 감정의 표현이었다. 언제부터 주주였는지(즉, 장기 주주도 아니면서 왜 그런 제안을 하는지), 사전에 알고 지내지도 않았으면서 왜 이런 프레젠테이션을 보내는지 등의 항의가 내가 마주한 K-거버넌스의 첫인상이었다.

기업 주주의 자격에는 기간이 적용되지 않는다. 간혹 아무런 성찰 없이 무조건 장기 투자9를 해야 한다고, 이를테면 주식은 사는 것이지, 파는 것이 아니라고 설파하는 투자자가 있다. 장기 투자를 해야 하는 경우는 한 가지다. 기업의 사업이 진입장벽 또는 경제적 해자를 가지고 있어서 꾸준히 자본비용 대비 높은 수익을 창출하고, 이익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경영진의 자본배분 능력과 주주 정책도 훌륭해서 기업의 가치가 주주 가치로 이어짐으로써 주주가 장기적인 부의 복리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경우다. 이런 기업은 매우 드물다. 대주주와 경영진의 이해관계와 일반 주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한국에서는 특히 더 드물다. 더구나 어떤 기업이 그런 기업인지 파악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장기 투자를 설파하는 것은 지적인 게으름의 산물이거나 주주 부의 감소를 야기하는 사회적 해악일 뿐이다. 물론 반대로 초단기 매매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초단기 매매는 주식을 기업의 소유 관점(주식의 본질)이 아닌 트레이딩의 도구로 바라보는 관점의 산물이고, 초단기 매매로 큰돈을 지속적으로 벌고 유지한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물론 초단기 매매가 시장의 유동성과 효율성에 미치는 장점을 부정하는 것 또한 아니다).

기업의 주식을 소유한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소유하는지 단기적으로 소유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기업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주인이 되는지 단기적으로 주인이 되는지의 차이일 뿐이다. 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은 발행시장에서 기업에 직접 자본을 투자한 주주의 소유권을 승계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통시장의 주식 투자자는 발행시장의 투자자와 다를 바가 없다.

아파트 구입을 예로 생각해보면, 아파트가 건설되고 처음으로 분양받은 사람만 집주인인 것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서 집을 산 사람은 집의 소유권을 넘겨받는다. 누구도 아파트 유통시장에서 집을 매수한 사람에게, 당신은 시행사나 시공사에 직접 자본을 납입하지 않았으니 소유권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집을 한 달 만에 판다고 해서 그 한 달 동안의 소유로 인한 제반 권리를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주식시장에서는 유독 유통시장 투자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있다. 주식회사 제도와 상장 제도는 기업에 영구 자본을 제공함으로써 안정적인 사업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즉, 주주 소유 자기자본의 소유권과 가치를 표상하는 주식을 상장함으로써, 투자자(주주)가 자본을 회수하고 싶을 때 회사로부터 직접 자본을 돌려받는 대신 주식시장(유통시장)을 통해 제3자로부터 회수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이러한 제도적 바탕 위에서 기업은 주주환원을 하지 않는 한 자본을 회수당할 불확실성 없이 사업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점을 가진 상장기업의 경영진은 주식의 가치가 자기자본의 가치를 정확히 반영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 즉, 상장기업의 경영진은 사업을 잘해서 자기자본의 가치를 키우고, 주식의 시장가치가 자기자본의 가치를 잘 반영하도록 하는 두 가지 임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많은 법 제도는 상장기업의 경영진이 두 번째 임무를 이행하지 않도록 하는 인센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주식의 시장가치가 자기자본의 가치를 잘 반영하게 하기는커녕 반대로 그 괴리가 커지도록 행동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상속·증여세가 자기자본의 실제 가치가 아니라 주식의 시장가치와 연동되어 있어, 대주주와 경영진은 주식의 시장가치를 낮추려는 인센티브를 갖게 된다. 상속·증여세율이 과도하다는 주장이 많은데 사실 더 큰 문제는 세금 제도가 세율이 아니라 주가와 연동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율이 65%이고 주식이 실제 자기자본 가치의 20%에 거래된다면 실질 세율은 65%가 아니라 13%가 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상속, 증여하려는 대주주라면 누구라도 주가를 낮추고 싶어 할 것이다. 상속·증여뿐만 아니라 합병 시에도 상장사는 기본적으로 시가를 기준으로 합병가액을 정하게 되어 있어 수많은 불공정 합병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상법과 법원은 이사의 신인의무를 앞서 언급한 경영진의 첫째 임무에 대해서만 적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사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 사업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는 첫 번째 임무와 동시에 두 번째 임무인 주주 가치 제고 임무 역시 가지고 있다. 거버넌스상으로도 주주총회를 통해 선임되는 이사는 주주의 대리인으로서 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법과 법원은 이러한 상식을 부정하는 것 같다. 특히 한국에는 경영진과 전체 주주의 이해관계 불일치라는 K-거버넌스 문제가 있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대주주 지분율이 높거나 실질적 지배력이 높아 대주주가 곧 경영진인 기업이 대다수이고, 이러한 구조에서는 경영진이 일반 주주의 이익을 희생함으로써 지배주주의 이익만을 위해 복무하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불공정 합병, 분할, 일감 몰아주기, 사업 기회 유용 등이 그 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법은 일반 주주를 보호해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앞의 사례로 돌아가서 ‘한국적 정서’는 과연 무엇일까? 그 직원이 의미한 바는 아마 회사의 지분 4.9%를 보유한 3대 주주일지라도 주인의식을 갖지 않아야 하는 정서, 사전 교감과 친분을 쌓기 전에는 주주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아야 하는 정서 등인 것 같다. 뉴욕-한국 간의 전화 통화 후 나는 한국으로 출장을 가서 해당 기업의 재무 담당 임원 및 IR 담당자와 미팅을 했다. 해당 미팅에서 나는 제안 사항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주주가 여러 가지 요구를 하는 것이 얼마나 당황스럽고 기분 나쁜 일인지에 대한 설교를 들으며 테이블 위에서 분노로 떨리는 재무 담당 임원의 주먹을 봐야만 했다.

회사의 반응이 당혹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회사의 주가가 극도로 저평가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투자자 자본의 수탁자로서 주주 가치 제고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이행했다. 주주제안을 했고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까지 갔지만 결국 지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2대 주주이던 국내 대형 운용사가 그 회사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주주제안이 아니라 회사 측 안건에 표를 주는 광경도 목격했다. 그 운용사는 최근까지 매입 단가 대비 큰 손실을 보고 해당 기업의 주식 대부분을 매도한 것이 지분공시를 통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