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옆방이 부산스러워 일찍 깼다. 동이 트지도 않았는데 서둘러 짐 챙기고 문을 쾅 닫고 뛰어나가는 옆방 사람들 소리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반. 어젯밤 자료 정리하느라 늦게 잔 탓에 도저히 지금은 못 나가겠다 싶어 더 잠을 청했다.
우리는 6시에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출발했는데 트위터를 보니 새벽 3시부터 줄 선 사람들이 현장을 생중계하듯 올리고 있었다. CHI 헬스센터 앞에 도착하니 이미 꼬리가 어디인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줄이 보인다. 1km 정도 걸어가니 마지막 사람이 나타났다. 오픈런이 비단 한국만의 문화는 아닌가 보다.
다행히 2층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CHI 헬스센터 수용 인원이 1만 8,000명인데, 1층 무대까지 빼곡히 의자를 놓아 좌석을 만든 덕에 2만 5,000명은 너끈히 참석 가능해 보였다. 한두 시간 후에는 자리를 뜨는 사람도 많아 좌석 확보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조금 늦게 도착한 사람은 버핏과 멍거의 얼굴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가 계단에 앉거나 벽에 기대어 선 채 자유로이 관람하는 분위기다.
버크셔 해서웨이 1분기 실적 발표와 Q&A 세션은 오전 9시 15분에 시작하지만 한 시간 전부터 옴니버스 영상들을 틀어준다. 20~30년 전 버핏과 멍거의 주주총회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상영하고, 버크셔 해서웨이가 보유한 회사들의 광고 영상들도 나름의 스토리를 뽐낸다.
백미는 버핏과 멍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짧은 콩트였다. 미국 유명 원로 여배우인 제이미 리 커티스(Jamie Lee Curtis)가 버핏을 ‘뷔페(buffet)’로, 멍거를 ‘헝거(hunger)’로 부른다. 90세를 훌쩍 넘긴 분들이 하루 종일 주총장에 앉아 주주들을 상대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콩트까지 찍은 걸 보면 여전히 삶을 즐기고 있구나 싶어서 부럽기도 했다.
버핏이 첫 인사말을 이렇게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영국 어디서 경쟁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습디다. 찰스 3세 대관식을 축하하던데(they were celebrating a ‘King Charles'), 우리한테는 버크셔의 찰스 국왕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we’ve got our own ‘King Charles’ here today)." 찰리 멍거를 소개하는 말이었다. 관중이 일제히 환호성과 박수 갈채를 보내면서 주총장의 들뜬 분위기가 더욱 고조됐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공식 주주총회 시간은 오후 4시 30분부터 1시간 정도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Q&A 세션은 그전에 오전 2시간 30분, 오후 2시간 30분 총 5시간 정도 진행한다. 질문은 CNBC에서 미리 이메일로 받아 그중 50~60개 정도를 간판 앵커인 베키 퀵(Becky Quick)이 엄선해 주총 당일에 직접 버핏과 멍거에게 물어본다. 흥미로운 건 어떤 질문이 들어왔는지 버핏과 멍거가 사전에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석에서 답변을 해야 하므로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지혜롭고 위트 넘치는 답변이 많이 나와 모두 이 Q&A 세션을 기다린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미국판 삼성그룹'이라고 할 정도로 사업 분야가 광범위하기 때문에 버크셔 하나만 봐도 미국 경기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다. 작년에 적자를 냈던 자동차보험사 가이코(GEICO)가 흑자 전환을 하면서 버크셔 전체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13%나 증가했는데도 버핏은 경기에 대해 부정적인 코멘트를 내놓았다. 계열사 중 BNSF(철도), BHE(부동산중개, 에너지)를 비롯해 경기에 민감한 사업들이 고르게 이익이 줄었기 때문이다. 연료비와 인건비가 증가하고 재고 부담도 커졌는데 인플레이션이 미국 경제에 부담을 지우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