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단상] '상법 개정' 없이 한국 자본주의 미래 없다
시장의 난무하는 소음 속에서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기본에 집중하고 올바른 원칙을 지켜야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투자 단상’은 현직 펀드매니저가 시의적절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코너입니다. 투자 대가들이 역경을 이겨낸 방법을 소개하고 실패 사례에서 배우는 기회도 마련하겠습니다. ― 버핏클럽
최근 야당이 ‘상법 개정’을 발의하면서 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사실 이사의 충실의무를 총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은 이미 지난 정부에서 발의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관심은 최근에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올해 국장(한국 주식시장)의 모습이 글로벌 증시와 괴리가 커지고 있는 현 상황도 그런 관심에 한몫한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피지수의 10년 이상 장기 수익률은 한국 GDP 성장률과 큰 괴리를 보입니다. 보통 한 나라의 자본시장이 그 나라의 장기적인 경제 성장을 추종한다고 보면, 한국 주식시장은 자본시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자본시장은 단지 자본시장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윌리엄 번스타인은 저서 《부의 세계사》에서, 한 국가가 산업화되려면 4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강력한 재산권 보호, 과학적 합리주의, 활발한 자본시장, 통신과 운송 인프라가 그것입니다. 이는 단지 ‘산업화’ 자체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혁신이 생산성 향상의 필수 요소라는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중 제대로 기능하는 ‘자본시장’을 갖추어야 혁신과 성장에 목마른 인재들이 뜻을 펼칠 ‘자본’을 원활하게 공급받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국내 시장 상장을 목표로 했던 기업들이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현상이 이제는 새롭지 않습니다. 시장 저평가가 장기화되다 보니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워졌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해외 시장에 상장하기가 여의치 않으면 아예 상장 자체를 늦추는 기업도 많습니다. 이런 기업들에 투자한 자본의 회수 기간도 함께 늘어나면서 자본이 제대로 돌지 않는 부작용도 커집니다.
이런 척박한 한국 시장에서 대주주와 기타 주주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킨 M기업의 사례는 유독 의미가 큽니다.
일단 이익의 50%를 환원하면서, 내수기업으로서 낮아질 수밖에 없는 ROE에 대한 시장의 기대를 긍정적으로 바꿨습니다. 그로 인해 주가를 평가하는 멀티플이 개선되었고 주가가 최근 수년간 꾸준히 우상향하고 있습니다.
매 분기 실적 발표에 C레벨 경영진이 직접 나와 경영 성과와 방향성에 대해 직접 소통합니다. 이는 기관과 개인 주주의 정보 격차를 없애고 장기 주주로 주주 구성을 바꿔주는 역할을 합니다. 당연히 주가 변동성도 줄어들고 이는 다시 장기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주주를 불러모읍니다.
경영진이 대주주만이 아니라 총주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면 임직원의 자사주 보유 비중이 높아지는 효과도 커집니다. 내부 직원은 대주주나 경영진이 먹튀 용도로 주가를 활용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환원을 계속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자사주를 보유하려는 인센티브를 갖게 됩니다. 이는 근로소득 외의 자본소득 확대로 이어지면서 외부의 유능한 인력이 해당 기업으로 모이는 선순환 효과를 가져옵니다. 실리콘밸리에 인재들이 모여들고 혁신이 끊이지 않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IT 기업 K사의 경영진 먹튀 사례는 이러한 철학의 부재가 조직력 와해까지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비싸게 상장한 후 경영진은 주식을 매도해 막대한 차익을 거뒀지만, 우리사주를 보유한 직원들은 매각 제한으로 주가가 폭락할 때까지 보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회사를 다니고 함께 회사 성장을 위해 힘썼지만 이해관계는 정반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는 근로의욕을 무너뜨리고, 조직력을 와해하며, 유능한 내부 인력을 대거 유출시키는 악순환에 빠뜨립니다.
동일하게 상장 이후 주가가 폭락했지만 꾸준히 자사주 매입·소각에 나서면서 주주환원을 통해 주가를 방어해나간 K 게임회사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신작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주가가 급락했으나 회사가 총주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믿음을 주어 장기적 관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주가가 빠진 상황에서 인재들에게 스톡옵션을 줌으로써 주주와의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 일치시켰습니다. 이후 경영 상황이 개선되었고 주가가 바닥에서 두 배 이상 오르면서, 상장 초기에 청약했던 직원 주주들은 손실을 거의 복구했습니다. 물론 바닥에서 스톡옵션을 받은 직원들은 근로소득 외에 큰 보상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대주주만이 아니라 총주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은 개인 주주만의 재산권 보호로 그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재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강력한 인센티브로도 작용합니다. 또한 주가의 장기 변동성을 낮춤으로써 주식이 장기적인 투자 자산으로 기능하게 해줍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게 본다면 장기적으로 코스피지수의 미래도 밝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부동산에 편중된 국민 자산을 금융으로 분산하는 역할을 하며 관련 리스크도 크게 줄여줍니다.
상법 개정과 함께 과도한 상속·증여세도 손을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율 자체보다 세금을 계산하는 기준의 변화가 더 중요합니다. 현재는 ‘주가’가 과세 기준이기 때문에 대주주 입장에서는 주가를 신경 쓸 인센티브가 없습니다. 오히려 절세하려면 주가를 낮추는 게 대주주의 이해관계에 더 부합합니다. 때문에 과세 기준을 ‘주가’에서 ‘공정가액’으로 바꿔야 합니다.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는 경영과 소유의 분리도 가속화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가업 상속과 경영 상속에 대한 구시대적 의식이 만연합니다. 뛰어난 경영자를 창업자의 혈연에서 발견할 확률은 당연히 외부에서 발견할 확률보다 현저하게 낮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여전히 창업자 자손의 가업 상속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창업자의 기업가정신이 희석되어 검증이 안 되고 실제 능력마저 낮을 가능성이 높은 혈연으로 후계를 한정하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총주주에 대한 이해관계를 충족할 수 있는 경영진은 그만큼 리스크를 감당해야 합니다. 이는 그만한 능력이 없는 대주주 일가를 경영에서 배제할 인센티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대주주 일가는 지배적인 주주로 남고 경영은 출중한 인재를 선임해서 맡김으로써 기업 전체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주가에 반영되며 경영진뿐만 아니라 유능한 직원의 유입을 유도해서, 위에서 언급한 선순환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물론 아무리 주주환원에 힘써도 근본적인 사업의 경쟁력을 잃으면 주가는 우하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성장’을 추구하며 달려왔고 투자자 역시 그런 요소들에 집중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업이 끝없이 성장할 수는 없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성장 뒤에는 소강상태가 필연적이고 이후 더 큰 도약을 위한 준비가 이뤄집니다. 물론 그 방향이 맞고 능력이 있어야 추가 점핑이 가능합니다.
주주환원은 성장 뒤의 소강상태에 주가가 연착륙하게 도와줍니다. 주주들이 기업을 믿고 기다릴 근거를 제공합니다. 유능한 경영진은 이 기간에 또 다른 기회를 열심히 탐색할 것이고, 이는 더 큰 성장을 통해 장기 주주들에게 부를 안겨줄 것입니다. 공개된 지속적인 소통은 기업에 대한 신뢰를 더 높여줍니다.
주주마다 이해관계가 다르니 충실의무를 확대하면 소송이 남발해 경영 마비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서 많이 벗어난 의견입니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주주들의 이해관계는 상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해당 기업의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라면 기업의 장기적인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의사결정을 반대할 가능성이 아주 낮습니다.
또한 헤지펀드의 경영권 침해 우려도 있지만, 이는 정상적인 주주 권리 실현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주로서 경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자본도 소위 ‘먹을 게’ 있어야 들어온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가가 제대로 평가받는 상황에서는 그런 인센티브가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경영에 관심을 갖고 접근하더라도 해외 사례를 보면 이사회 일부를 요구하는 수준이 대부분입니다. 경영진 자체를 갈아엎는 경우는 철저한 경영 실패 외에는 흔치 않습니다. 과거에 디즈니의 일부 지분을 확보한 서드포인트는 오히려 디즈니 경영진이 단기 성과에 너무 집착한다고 질타한 바 있습니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사가 ‘회사’에 대해 충실의무를 집니다. 다만 ‘회사’의 범주에 총주주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판단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회사’에 대한 충실의무는 ‘총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로 해석됩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회사’에 대한 충실의무가 기타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로 확장되지 않는다는 과거의 판결이 있었습니다. 이후 대주주와 기타 주주의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로 인한 주가 저평가 상황은 단순히 자본시장의 붕괴를 넘어 한국 자본주의 자체의 존립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한국 기업들의 거버넌스를 국제적인 기준으로 높여야 합니다. 이는 자본시장 활성화를 넘어 기업의 생산성을 한 차원 높이는 기반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